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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 아툴 가완디

thinknew 2016. 10. 17. 16:39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다. 또 인간의 본성에 관한 깊이있는 통찰을 제공하는 진화심리학도 죽음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리 설계를 잘하더라도 죽음을 실험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철학과 신학도 죽음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죽음 이후를 논할 뿐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다. 안락사에 관한 논의는 이 범주에 포함된다. 또 가장 최근에 등장한 개념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환자들의 고통을 완화시키는데 촛점을 맞춘 '호스피스' 개념이다. 이 호스피스 개념과 유사한, 'assisted living(도움을 받는 삶)'을 주장하는 의사가 있다. 


저자는 의사이자 저술가이다. 의료 문제를 다룬 것은 아니지만 저자의 인기있는 저작 '체크, 체크 리스트'의 요약이 이 블로그에 있다. 아무튼 저자는 이미 언급한 대로 'assisted living(도움을 받는 삶)'을 주장한다. 저자가 이 방식을 주장하게 되는 과정은 의사로서의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다. 먼저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같이 임상의가 되려는 사람들이 환자들과 맺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관계에 관한 논문이었다. 그중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관계는 '가부장적paternalistic' 관계다. 의사는 의학적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서 환자에게 최상의 치료를 제공하는 걸 목적으로 삼는다. 의사는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 두 번째 유형은 '정보를 주는informative' 관계다. 가부장적 관계와 정반대 개념이다. 의사는 환자에게 사실과 수치를 제공한다. 나머지는 모두 환자에게 달려 있다. …… 의사와 환자가 맺을 수 있는 세 번째 관계 유형을 기술한다. 그들은 이를 '해석적interpretive' 관계라고 불렀다. 이 관계에서 의사의 역할은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첫번째와 두번째 생각이 혼재되어 있는 상태이다. 미국에서도 세번째 유형은 최신의 경향에 속한다. 저자의 주장은 이 세번째 경향에 포함된다.

저자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근거 중의 하나는 다음 구절에서 나온다.
"의학은 죽음과 질병에 맞서 싸우기 위해 존재한다는 단순한 시각도 있다. 물론 그것이 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임무다. 그러나 죽음이 적이라고 한다면, 그 적은 우리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결국은 죽음이 이기게 되어 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면, 우리는 아군이 전멸할 때까지 싸우는 장군을 원치 않는다."
"의료계 종사자들은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못 생각해 왔다. 우리는 사람들의 건강과 생존을 보장하는 것이 주된 임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상의 일을 해내야 한다. 바로 환자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이다. 행복은 한 사람이 살아 있기를 바라는 이유와 깊은 관련이 있다. 삶의 이유는 단지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거나 심각한 장애를 겪게 됐을 때만 중요한 게 아니다. 인생 전반에 걸쳐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살아가면서 심각한 질병이나 부상을 당할 때마다, 그리고 심신에 큰 타격을 입을 때마다 우리는 매우 중요하면서도 동일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두려운 것은 무엇이고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기꺼이 포기할 용의가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최상의 행동방침은 무엇인가?"

이 마지막 구절은 저자의 결론에 해당되기도 한다.

저자의 주장이 타당하긴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경제적인 부담에서는 벗어나 있는 은퇴 노인들의 경우에 한정된 것이기도 하고, 저자는 책의 끝부분에 잠시 언급했지만 '안락사' 문제도 같이 고려되어야 하므로 보편적으로 적용하기에는 너무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언급한 안락사와의 관계는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근본적으로 볼 때 이 논쟁은 우리가 어떤 실수를 저지르는 걸 가장 두려워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고통을 연장시키는 실수와 가치 있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실수 (안락사 또는 자살) 중 어느 것을 더 두려워하는지에 관한 문제라는 의미다. 건강한 사람들이 자살하는 걸 막는 까닭은 그들의 정신적 고통이 일시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경우 우리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면 기억하는 자아가 경험하는 자아와 다른 시각으로 문제를 인식하리라는 걸 믿는다. 사실 자살 기도를 했다가 살아난 사람들 중 극소수만 제시도를 하고, 대다수는 결국 살아 있어서 기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 환자들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들을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이들어 병드는 과정에서 생각해야 할 것으로 저자가 언급한 부분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그런 용기를 갖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 진실을 직면하기를 꺼린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문제는 어떤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기 어려운 때가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나는 이게 단지 불확실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기 어려우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아는 것도 어렵다. 그러나 나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가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데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 외에도 심리학과 행동경제학에서 밝혀낸 사실들에 대한 설명도 알아 둘 필요가 있는 것들이다.
"뇌는 고통과 같은 경험을 두가지 방식 - 경험하는 순간에 내리는 평가와 나중에 내리는 평가 -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이 둘은 굉장히 모순된다."
"우리는 통증 지속 시간이 짧은 쪽보다 긴 쪽이, 그리고 평균 통증 척도가 낮은 쪽보다 높은 쪽이 더 나쁠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환자들의 반응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최종 척도를 평가할 때 통증 지속 시간은 대개 무시됐다. 대신 최종 척도를 가장 잘 예측할 수 있는 지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카너먼 박사가 말한 '정점과 종점 규칙Peak-End rule'이다. 이는 가장 아팠던 순간과 마지막 순간에 느낀 통증의 척도를 평균낸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자아를 가진 듯하다 하나는 매 순간을 동일한 비중으로 견뎌내는 '경험하는 자아experiencing self'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흐른 후 최악의 시점과 종료 시점 단 두 군데에만 거의 모든 비중을 실어서 평가하는 '기억하는 자아rememberifig self'다. 기억하는 자아는 심지어 마지막 순간이 완전히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할 때조차도 '정점과 종점'에 고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밖의 수많은 연구에서도 '정점과 종점 규칙'에 비중을 두는 경향과 고통이 지속되는 기간을 무시하는 경향이 확인됐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즐거웠던 경험을 기억할 때도 똑같이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결국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조망할 때는 단순히 매 순간을 평균내서 평가하지 않는다. 어차피 삶은 대부분 잠자는 시간을 포함해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간다. 인간에게 삶이 의미 있는 까닭은 그것이 한 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단위라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구도는 의미 있는 순간들, 즉 무슨 일인가 일어났던 순간들이 모여서 결정된다."


이 책은 의사로서 노인 환자들을 보면서,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을 가까이서 직접 겪으면서 깨달은 것들을 서술한 것이어서 개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내용들은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의 독서 추천은 '일독을 권함'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