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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타주의'에 대한 검토이다.
"인간 이타주의의 진화론은 이타주의의 유형들이 대부분 궁극적으로 이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때문에 한층 더 복잡해진다."
"우리는 협동을 두 가지 기본 유형으로 구분해야만 한다. 먼저 이타적 충동은 타인을 향한 비합리적이고 일방적인 것일 수 있다. 즉 베푸는 자는 똑같은 보답을 바란다는 욕망을 결코 표현하지 않으며, 그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그 어떤 무의식적 활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형태의 행동을 <맹목성 hardcore> 이타주의라고 불러 왔다....... 반면 <목적성 softcore> 이타주의는 궁극적으로 이기적이다. 이 〈이타주의자〉는 사회가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에게 보답해주기를 기대한다. ........ 목적성 이타주의는 인간에게서 극단까지 정교해져 왔다. 먼 친척 혹은 무관한 개인 사이에 이루어지는 보답은 인간 사회 구성의 열쇠이다. 사회 계약의 완성은 엄격한 친족 선택이 부과했던 고대 척추동물의 속박들을 깨뜨렸다. 탄력적이고 무한히 생산적인 언어 및 어구 분류의 재능과 결합된 보답의 관습을 통해, 인간은 문화와 문명을 건설할 수 있을 만큼 오래 기억되는 계약을 맺는다."
"왜냐하면 친족 선택에 바탕을 둔 순수한 맹목성 이타주의는 문명의 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토에 대한 결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나는 인간 행동의 맹목성 대 목적성 이타주의의 상대적 비율을 낙관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간은 한없이 더 큰 조화와 사회적 항상성을 이룰 수 있을 만큼 계산적이고 또 충분히 이기적인 듯하다. 이 말은 자기 모순이 아니다. 포유동물 생물학의 속박에 복종하기만 한다면, 참된 이기주의는 거의 완벽한 사회 계약을 이룰 열쇠가 된다."

마지막으로 '종교'에 대한 검토이다.
"종교 신앙을 갖고자 하는 성향은 인간 정신 중 가장 복잡하고 강력한 힘이자, 아마 인간 본성 중에서 근절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불가지론자인 에밀 뒤르캠은 종교 행위가 그 집단의 정화이자 사회의 핵심이라고 규정했다. 그것은 수렵 채집인 무리에서 사회주의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에 뚜렷이 나타나는 보편적인 사회적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 또한 생물학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비록 종교적 경험이 찬란하고 다면적이어서, 가장 세심한 정신분석학자들과 철학자들조차 그 미궁에서 헤멜 정도로 복잡하다고 할지라도, 나는 종교 행위들을 유전적 이득과 진화적 변화라는 이차원 상에서 측량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저자도 무신론자 대열에 끼일 법하다. 하지만 저자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이야기하진 않는다.
"종교적 행동에 유물론적 근거가 있고, 그 근거가 전통 과학의 이해 범위 내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해독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종교는 부인할 수 없는 인간 종 고유의 주요 행동 범주에 속한다. 기존의 집단생물학과 하등 동물의 실험 연구들로부터 이끌어낸 행동 진화의 원리들은 직접적인 방식으로는 종교에 적용할 수 없을 것 같다. 둘째, 핵심적인 학습 규칙들 및 그것들의 궁극적인 유전적 동기는 아마 자각하는 정신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란 무엇보다도 개인이 자신의 직접적인 사리사욕을 집단의 이익에 종속시키도록 설득당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자신이 과학자이자 무신론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외부의 그 어떤 통제도 필요 없는 물리 법칙에 복종한다고 여겨진다. 과학자들은 경제적인 설명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신성한 정신 같은 외부 관리자를 배척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생물학사의 중요 단계, 즉 종교 자체가 자연과학의 설명 대상이 되는 시점에 도달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보여주고자 한 대로, 사회생물학은 유전적으로 진화하는 인간 뇌 속의 물질 구조에 작용하는 자연선택 원리를 통해, 신화의 근원 자체를 설명해 낼 수 있다."
무신론자 그룹의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에서, 오랫동안 기독교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서양 사회에서, 그리고 현대에는 특히 미국에서 무신론자들은 소수이기도 하고 많은 불이익를 받기 때문에 무신론자이면서도 무신론자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고 한 바 있다. 저자도 그런 사회의 압력에서 자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마지막 장의 제목은 '희망'이라고 붙였다. 이는 인간 정신의 세 단계의 딜레마를 이야기하고 그런 딜레마를 진화론과 사회생물학을 바탕으로 극복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과학적 유물론이 인류의 마지막 대안이 될 것임을 암시한다.
"첫번째 딜레마는 전통 종교 신화와 그 세속적 대체물들,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에 바탕을 둔 주류 이데올로기들이 지닌 신화들이 숙명처럼 쇠퇴함으로써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쇠퇴는 도덕적 합의의 상실, 인간 조건에 대한 심각한 무기력감, 자아와 미래에 대한 무관심 등을 낳았다. 첫번째 딜레마의 지적 해결책은 생물학의 발견들과 사회과학의 발견들이 결합된 인간 본성을 더 심층적이고 과감하게 연구함으로써 찾을 수 있다."
"이런 첫번째 딜레마의 해결책이 일부나마 옳다고 증명된다면, 그 해결책은 두번째 딜레마 즉 의식적 선택은 타고난 정신적 성향들 중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딜레마와 직결된다. 인간의 본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란 어떤 다른 통로가 아닌 특정한 통로를 따라 발달하도록 사회적 행동을 인도하는 학습 규칙들, 감정 강화 요인들, 호르몬 되먹임 고리들이다."
"세번째이자 어쩌면 마지막이 될 정신적 딜레마 ........ 인간 종은 자신의 본성을 바꿀 수 있다. 인간 종은 무엇을 선택할까? 부분적으로 낡아버린 빙하기의 적응 양상과 통일한, 날림으로 지은 흔들거리는 토대 위에 그대로 남아 있을까? 아니면 더 많은 - 혹은 더 적은 - 감정적 반응 능력을 지닌 채 더 고도의 지성과 창조성을 향해 나아갈까?"
"진정한 프로메테우스적 과학정신은 인간에게 물리적 환경을 지배할 몇 가지 수단과 지식을 줌으로써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다른 단계, 새로운 시대에 그것은 또 과학적 유물론의 신화를 구축할 것이다."


이 책은 광범위한 논증을 하고 있어서 이 정도의 요약으로는 이 책의 내용을 전달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그러므로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반드시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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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회생물학을 제창한 에드워드 윌슨의 3부작 '곤충의 사회들', '사회생물학', '인간본성에 대하여'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윌슨이 제시한 사회생물학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사회생물학은 대체로 사회성 생물 종들의 비교 연구를 토대로 하고 있다. 모든 생물은 진화 실험의 산물, 즉 수백만 년에 걸쳐 유전자와 환경 사이에 이루어진 상호작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저자인데도 책 마다 정의가 조금씩 다른 것은 표현이 다른 것이지 정의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니다. 서구의 학술적 전통에서는 자신의 글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베끼는 것은 표절에 해당된다.

생물의 사회성을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사회성도 진화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회생물학은 남녀 간, 인종 간 차이를 선천적인 것이라고 함으로써 한동안 심각한 문제였던 차별을 정당화한다는 점 때문에 극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윌슨은 차별을 정당화한 것이 아니다. 근대 이후 차별의식때문에 많은 문제점이 드러남으로 해서 모든 차별은 부정되고 오직 환경의 영향 만이 중요하다고 인정되었다. 남녀의 차이도, 인종 간의 차이도 모두 부정되는 상황에서, 인간은 유전자와 환경의 영향을 같이 받는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유전자의 영향을 중요하게 거론한 것이 오해를 불러온 것이다. 저자는 이런 비판에 굴하지 않고 사회생물학을 지속적으로 주장하였으며, 진화심리학의 진전에 힘입어 신다윈주의 진화론으로 통합이 되어 가고 있다.

사회생물학 3부작 중 앞의 두 책은 생물의 사회성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에 주안점이 두어졌다면, 이 책은 인간의 본성이 생물학적으로 규명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논증을 주로 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인간도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여 인간 중심주의자들의 분노를 샀다.
"인간 본성의 일반 형질들은, 다른 모든 종들의 형질이라는 거대한 배경 앞에 놓고 보면 유한하며 특이해 보인다. 그러나 더 많은 증거들은 수많은 상투적인 형태의 인간 행동들이 일반 진화론에서 예측한 대로 포유동물의 것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영장류의 특정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구체적인 사회 생활과 정신적 특성을 볼 때, 침팬지는 이전에는 비교 자체가 부적당하다고 여겼던 영역들에서도 인간과 거의 같은 등급에 놓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인간과 가깝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유전적 토대 위에 있다는 가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행동이 근연 관계에 있는 종들과 공유하고 있는 일부 유전자와 인간 종 고유의 유전자로 조직된다는 가설과 일치한다. 한편 이런 사실은 수 세대 동안 사회과학의 주류를 차지해 온 경쟁 관계에 있는 가설, 즉 인류가 전적으로 문화에 토대를 두는 수준까지 자신의 유전자로부터 탈출해 왔다는 가설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사유의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하지만 인간 본성을 이야기하자면 '자유의지'라는 철학적 명제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저자도 그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한다. 당연히 자유의지의 문제도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수 세기 동안 위대한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은 결정론 대 자유의지라는 커다란 역설을 붙잡고 씨름해 왔다. 이 역설을 생물학적 용어로 바꾸면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 유전자들이 유전되고, 우리의 환경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작동하고 있었던 물리적 사건들의 인과 사슬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뇌 속에 진정한 독립 행위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행위자 자체는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해 창조된다. 그러므로 자유란 단지 자기 기만이 아닐까?"
"결정론과 자유 의지 사이의 역설은 이론적으로 해결이 가능할 뿐 아니라, 물리학과 생물학의 경험상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정신의 토대가 정말로 기계론적이라고 해도 우리가 동전의 경로나 꿀벌의 비행을 한정된 범위까지만 도표화할 수 있듯이, 각 인간의 세세한 행위들을 예측해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지성을 지닌 존재는 있을 것 같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정신은 매우 복잡한 구조이며, 인간의 다양한 사회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 정신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영향 하에 있는 개인이나 인간이 어느 한 사람의 구체적인 역사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근원적인 의미에서 너와 나는 자유롭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차적이고 더 약한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행동이 부분적으로 결정되어 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행동 범주를 충분히 넓힌다면, 사건의 예측은 신뢰를 얻는다."


근친상간 금기, 의지의 문제 등도 거론하지만, 인간의 행동의 네가지 범주 즉, 공격성, , 이타주의, 종교에 각각 한 장씩을 할애하여 사회생물학적 이론의 토대위에 다시 검토한다.,

먼저 공격성에 대한 검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공격성은 타고난 것일까? ……… 이 질문의 답은 <그렇다>이다."
이런 결론은 이 결론을 인정하는 집단과 인정하지 않는 집단 양방향에서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신중한 논증을 전개한다.
"다른 수많은 행동이나 <본능>과 마찬가지로 명확히 정의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종의 공격성이란 사실상 신경계 내에서 각기 별도의 통제를 받는 서로 다른 반응들의 배열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 적어도 일곱 가지 범주는 구분이 가능하다. 영토의 방어와 정복, 잘 조직된 집단 내에서의 서열 찾기, 성적인 공격성, 젖을 떼기 위한 적대 행동, 먹이를 향한 공격성, 포식자에 대항하는 방어형 역공, 사회 규범을 강화하는 데 쓰이는 도덕적이고 훈육적인 공격성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개체 밀도 당 공격 행위의 빈도를 계산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록 공격 성향이 뚜렷하다고는 해도 우리는 가장 폭력적인 동물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짖는다.
"인간의 공격 행동이 유전자와 환경 사이의 구조적이고 예측 가능한 상호작용 패턴이라는 관점은 진화론과 부합된다."

다음은 '인간의 성'에 관한 검토이다.
"성의 복잡성과 다의성은 성이 본래 번식용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나타난다."
"증식이 번식 행동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우리의 포유동물 조상들은 성없이 진화할 수도 있었다. 모든 인간은 성별 없이 무성 자궁의 표피 세포에서 싹렀을지도 모른다."
"쾌락은 기껏해야 동물들을 교미하게 만드는 장치이며, 다용도의 신경계를 지닌 생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시간과 에너지 를 구혼, 성교, 양육에 대규모로 투자하도록 유인하는 수단일 뿐이다."
"더구나 성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보아도 불필요하거 낭비되는 위험한 활동이다."
"주된 해답은 성이 다양성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성이란 부모가 예측할 수 없이 변화하는 환경을 놓고 양쪽에 돈을 거는 방법이다."
"다양성과 그 결과인 적응성은 왜 그렇게 많은 종류의 생물들이 유성생식이라는 수고를 하는지 설명해 준다. 장기적으로 보면, 직접적이고 간단한 성별이 없는 번식 방법에 의존하는 종에 비해 유성생식 종은 수적으로 크게 우세해 진다."


이상의 논증은 별로 논란 거리가 될 것이 없지만 다음과 같은 언급은 여성해방운동가들의 반발을 산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성적 상대의 교체가 대부분 수컷 주도로 이루어지는 온건한 일부다처제형이다."
"대체로 여성들은 남자들에 의해 한정된 자원 따라서 가치는 소유물로 취급되기 때문에, 상승혼, 즉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 혼인 풍습의 수혜자가 된다. 일부다처제와 상승혼은 본질적으로 상보적인 전략이다. 다양한 사회에서 남성들은 추구하고 획득하는 반면 여성들은 보호되고 교환된다. 아들들은 난봉꾼이 되고 딸들은 유린당할 위험에 처한다. 성이 매매될 때 대개 구매자는 남성이 된다. 매춘부는 당연히 사회의 멸시 대상이 되기 쉽다."
"또 평균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기질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포유동물 생물학의 일반 원칙과도 부합된다. 집단으로서의 여성은 덜 단호하고 신체적으로도 공격성이 덜하다. 그 차이의 정도는 문화마다 다르다. 평등주의자들이 설정하는 사회처럼 단지 미미한 통계적인 차이만 있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극단적인 일부다처제 사회처럼 여성이 사실상 노예 상태에 있는 사회도 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어느 정도 있는가 보다는 여성들이 성격 면에서 이렇게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하다."
"즉, 성별에 따른 적당한 유전적 차이가 존재하며, 행동 유전자들은 기존의 거의 모든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심리 발달의 초기에 뚜렷한 분화를 낳고, 그 분화는 그 뒤의 심리 발달 과정에서 문화적 제재와 교육을 통해 거의 대부분 확대된다고 말이다."

그동안 남녀 차별이 문제가 되어 왔으므로 차별을 용인해서는 안되겠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남녀의 차이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명한 대응이 아니다. 그보다는 차별이 발생하는 구조적 요인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그것이 차별로 기능하지 않도록 억제책을 강구하는 것이 현명한 대응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인간의 성에 대한 검토의 결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유달리 빈번하게 행해지는 남녀의 성행위는 남녀의 결합을 확고하게 하는 주된 장치 역할을 했다. 또한 그것은 남성끼리의 공격성을 약화시켰다."
"이것들(인간의 성적 쾌락)은 번식과 거의 관련이 없다. 그것들은 모두 결속과 관련이 있다."


다음 글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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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는데 일각에서는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그러면 열풍이 불고 있는 '인문학'은 무엇이고, 죽어가고 있는 '인문학'은 무엇인가? '인문학'은 르네상스('고전의 부활'이라는 의미) 시대에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고대 세계의 문헌에서 그 답을 찾으려는 노력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인문학이나 신 중심의 세계관이 서 있었던 공통의 기반은 인간, 특히 인간의 정신은 물질 세계와는 별개의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을 '비과학'과 동일시 하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이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모순이 발생한다. 열풍이 불고 있는 '인문학'은 과학, 기술 문명이 안정적인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을 좀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과학, 기술 세계 외부의 어떤 것에서 그 답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다. 그래서 인문학 강좌를 들어보면 고전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이야기한다. 한편, 죽어가는 인문학은 철학이 안고 있는 딜레마, 즉 오랜 논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일관성있는 설명을 하지 못함으로써 그 효용 가치가 점점 퇴색되어 가고 있는 그 인문학을 말한다.

생물학이 과학의 한 분야로 확고하게 자리잡고, 진화론이 생물계의 법칙으로서의 위치를 구축해 감에 따라 생물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본성'을 해명하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신경생리학, 분자생물학, 진화심리학 등이 발전함에 이제 "인간 정신의 신비는 풀렸다"라고 주장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인문학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열망한다면 '비과학'에서 그 답을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과학'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인문학'이 '비과학'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오류이다.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는 것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평가되는 진화심리학은 그 설명을 서구의 지적 전통에 전혀 기대지 않고 독자적으로 설명을 전개한다.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위 말하는 '인문학자'들은 과학을 단지 학문의 한 분과로 치부하고 자신들은 수천년 동안 공허한 논쟁만 이어 온 그 지적 전통에 여전히 매달리고 있다. 진화론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진화는 최선의 경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말을 바탕으로 앞의 상황을 유추해 보면, 과학적 접근을 거부하는 인문학이 당장 죽진 않을 것이며, 어쩌면 생각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인문학은 내내 사회를 향하여 자신들을 살려달라는 읍소를 계속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야기할 이 책'이것이 생물학이다'는 앞서 소개했던 에릭 캠벨의 '기억을 찾아서'에서 생물학이 어떻게 인간의 본성을 규명해 가는지에 대해서 한 이야기의 초기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에른스트 마이어도 여기에서 생물학이 어떻게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는데 근접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먼저 생물학이 거쳐온 과정을 이야기한다.
"17세기의 과학혁명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참 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과학이란 '정확한' 과학을 의미했다. 물리학, 화학, 역학, 천문학 등 주로 수학을 사용하여 보편적인 법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과학 분야만을 생각했다. 이 시기에는 물리학이 과학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생물계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열등한 분야로 취급됐다."
"복잡한 생명계의 모든 속성들이 최소의 구성요소들(분자, 유전자 등)만 연구하면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말도 되지 않는다. 생물은 분자, 세포, 그리고 조직으로부터 생명체 전체, 개체군, 그리고 종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점점 더 복잡한 체계를 구성한다. 한 단계씩 오를 때마다 구성요소들에 관한 지식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특성들이 나타난다."
"생물학은 사실 개체군적 사고, 확률, 우연성, 다원주의, 창발성, 역사적 담론들로 이뤄져 있다. 생물학과 물리학을 비롯하여 모든 과학 분야의 연구방법들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과학철학이 필요했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이 인간의 본성을 아직은 완전하게 규명하지는 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더할 수 없이 중요한 또 다른 분야인 정신세계를 다루는 생물학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아직 극히 일부만을 이해했을 뿐이고, 폭넓은 분석을 하기에는 신경생물학과 심리학에 대한 나의 지식이 너무나 짧다."

그리고 이 시대의 '교양'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화, 생물다양성, 경쟁, 멸종, 적응, 자연선택, 번식, 발생은 물론 이 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다른 주제들을 비롯한 기본적인 생물학적 개념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구증가, 환경 파괴, 도시문제 등은 기술의 발전이나 문학 또는 역사학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의 생물학적 뿌리에 대한 이해에 기초를 둔 노력만이 풀 수 있는 문제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말했던 "너 자신을 알라"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의 생물학적 기원을 알아야 한다."

생물학이 어떻게 인간의 본성에 접근했는가는 다음 글에서 요약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인문학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보자.
"사실의 추구와 발견은 확실히 과학의 영역이지만 그 외에는 상당한 부분이 서로 겹친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영역을 이론화하고, 일반화하고, 개념틀을 세우는 일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의 부분으로 인정한다. 실제로 이러한 작업을 통해 진정한 과학자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과학철학자들이 이론화와 개념 형성은 철학의 영역이라고 느낀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이런 노력의 대부분은 과학자들에게 넘어갔다. 생물학자들이 발전시킨 기본적인 개념의 상당 부분은 철학자들에 의해 흡수되어 철학의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불화는 흔히 과학자들이 연구에 있어 '인간적 요소'를 받아들이는 데 실패한 탓으로 돌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 과학, 특히 진화생물학, 행동과학, 인간발달, 체질인류학의 발견들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은 대부분 인문학에 필수불가결하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인문학자들이 그런 지식을 얻는 데 실패해 자신의 저술에 그런 주제와 관련된 당혹스러운 무지를 드러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과학에 대한 자신의 빈약한 이해를 변명한다. "나는 수학에 재능이 없다." 실제로 인문학자들이 가장 익숙해야 할 생물학 분야에는 수학적인 것이 별로 없다."
"인문학자가 지구의 인구과잉, 전염병의 확산, 회복할 수 없는 자원 고갈, 해로운 기상 변화,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농업 수요, 자연서식지의 파괴, 범죄행위의 증가, 교육제도의 실패와 같은 정치적 문제에 직면할 때, 생물학 성과에 대한 무지는 특히 위험하다. 이런 문제들은 과학의 성과, 특히 생물학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너무나 자주 정치가들은 무지 속에서 정책을 편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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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은날 2016.06.08 22: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정보 잘보고 갑니다


심리학이 과학의 한 분야로 완전히 편입되고, 진화심리학으로 수렴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과학적 해석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우리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선의 요소와 악의 요소를 심리학적으로 규명함과 더불어 한동안 무시되었던 이성의 역할에 대한 것도 아울러 이야기한다.

우리가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바탕에는 도덕 감정이 있다. 이 도덕 감정은 오랫동안 정신의 작용이었으며, 그 기원은 또 신에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론으로 무장한 심리학은 그것이 허구임을 입증하고 있고, 이 책의 저자도 거기에 협력한다. 리처드 도킨스가 촉발시킨 이기적 유전자 논쟁 이후, 인간의 본성이 뇌의 화학작용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주로 거론하는 것이 이타성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식의 이타성(이기적 목적이 개입되지 않은 이타적 행위)을 두고 신이 도덕 규범을 심어 놓은 증거라고 생각한다. 중에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과 도덕적 행위가 생물학적 진화의 힘으로 완전히 설명될 없음을 이런 자기희생적 행위가 증명한다고 주장하는, 미국 국립 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원장 프랜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 같은 저명한 과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간단한 반론으로 저런 논의가 타당하지 않음을 보인다.
"만약 우리의 놀라운 친절함이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라면, 엄청난 악을 저지를 있다는 점은 악마의 존재에 대한 증명인가?"

저자는 도덕성을 규명하기 위해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접근할 뿐, 철학적 전통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도덕성' 무슨 뜻인가? 도덕 철학자들조차 도덕성이 정말로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동의하지 않으며, 철학자가 아닌 많은 사람들은 아예 단어를 쓰지 않으려 한다. ………… 용어에 대한 논쟁은 따분하다. 어떤 의미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쓰면 그만이다. 나는 도덕성- 뭐라고 부르든 이것이 내가 탐구하고 싶은 것이다 - 행동에 대한 제한 말고도 많은 것을 포함하는 의미로 쓴다."

저자는 아기들의 반응을 주로 연구한다. 갓 태어난 아기부터 유아들에게서 도덕성의 근거가 되는 어떤 반응들이 관찰된다면 그것은 도덕성을 타고 난다는 좋은 증거가 된다. 유아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유아들이 기본적인 물리 현상을 이해할 수 있으며, 공정성에 대한 감각도 타고 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 다음과 같은 점도 발견된다.
"아기는 스스로 선하거나 못된 일을 있기 오래 전부터 다른 사람의 선하거나 못된 행동에 민감하다. 따라서 '도덕적 감각' 먼저 다른 사람에게 향하다가, 나중에 발달상 어느 시점이 되면 자신에게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점이 되면 아이가 자신을 도덕적 행위자로 보게 되며, 이런 인식은 죄책감, 수치심, 자부심으로 발현된다."
"아이들은 평등을 기대하며,자원을 똑같이 나누는 이를 선호하며, 자신이 자원을 배분할 때도 똑같이 배분하려는 편향을 강하게 보인다. 이는 우리가 일종의 공정함 본능을 타고난다고 보는, 천부적 평등주의자라고 보는 인간 본성에 대한 특정한 그림과 들어맞는다."
그러나 저자가 사람들은 이타적인 존재로 태어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을 때는, 우리가 정말로 부를 나누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자기 자신이 관련되어 있을 때는 로빈 후드 이론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상대적으로 이득을 보려고 한다.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평등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부와 지위에 대한 이기적 관심이다."

근대 르네상스 이후 인간의 이성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았다가 사실은 이성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그동안 계속 부차적인 것으로 여겨져왔던 감정이 인간 본성의 중요한 요소로서 부각된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의 본성에서 이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소멸하다시피 한 것에 대해 저자는 도덕감정에도 이성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어른의 도덕성이 합리적 숙고에 의해 영향 받는다는 콜버그의 주장은 옳다. 이것이 인간과 침팬지가, 어른과 아기가 다른 점이다. 이들에게는 감성만 있지만 우리에게는 '감성 + 이성' 있다."

이 외에도 저자는 우리의 본성 속에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하는 경향이 내재해 있으며,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들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공감과 동정심도 구분하고, 역겨움이 어떻게 도덕적 감정의 바탕이 되는지도 설명하는 등 도덕감정의 진화론적 근거에 대해 최대한 설명한 다음 도덕감정에 대한 철학적 접근법의 문제점도 짚고 넘어간다.
"도덕 철학자들은 복잡하고 부자연스러운 도덕적 딜레마를 생각해 , 그런 문제에 자신의 직관을 적용함으로써 자기 이론을 정교화할 때가 많다. 이는 일부 심리학자들이 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심리학자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에 관심 있는 반면, 철학자들은 정말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인지에 관심 있다는 점이 다르다. 도덕적 직관들은 때로 모순된다: X Y 똑같은 시나리오를 다른 식으로 기술한 것에 불과할 때도, X 도덕적으로 옳지만 Y 도덕적으로 그르다고 생각될 있다. 심리학자는 이런 모순을 인간 마음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로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멈출 있다. 하지만 철학자는 그럴 없다."

또 저자는 "우리의 선함을 신의 개입에 대한 증거로 보는 사람들도있음"을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하지만 그들은 옳지 않다. 번식 목적에 전혀 도움 되지 않는 이타적 동기- 낯선 이를 구하려고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때처럼, 자신과 자기 유전자에게 해를 끼치는 선택을 하도록 만들더라도 - 존재 자체는 생물학적 진화와 완전히 부합한다. 따지고 보면 자연 선택은 천리안이 아니어서 예상되는 미래 환경이 아니라 현재 상황에 반응하기 때문에,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부적응적 행동은 진화 이론과 완전히 부합한다. 다른 영역에서도 그런 것을 상당히 쉽게 찾아낼 있다."
"종교가 도덕적 진보를 이끄는 주된 힘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도덕성에 대한 어떤 논의도 종교를 논의하지 않고는 완전할 없다."
"공정한 관찰자라면, 주요 국제 자선 단체의 설립이나 미국의 시민권 운동처럼 지금 우리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많은 도덕적 기획들이 종교적 믿음에 기반을 두며 종교 지도자들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것이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끔찍한 만행들 일부를 종교적 믿음이 유발했다는 역시 마찬가지로 명백하다."
게다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만행들이나 정반대의 행위인 선행들이 사실은 믿음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공동체의 영향이라는 것을 보인다.
" 이런 상관관계가 존재하는지 탐구하기 위해, 정치 과학자 로버트 퍼트넘 (Robert Putnam) 데이비드 캠벨 (David Campbell) 사람들에게 사후세계, 도덕에서 신이 차지하는 중요성, 그리고 종교적 믿음의 다른 다양한 측면들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변들 중에 자원 봉사나 자선 기부 같은 행동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 호의적인 행동을 위해 중요한 것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종교적 소속이다."

저자는 인간 본성 속에 내재해 있는 도덕감정들이 선한 쪽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이성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글을 마무리짓는다.
"우리의 도덕 생활에 대한 옳은 이론은 부분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것은 우리가 갖추고 태어나는 것에서 시작하며 이것은 놀랍도록 풍부하다. 아기는 도덕적 동물이며,공감과 동정심을, 다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는 능력을, 심지어 정의와 공정함에 대한 어느 정도의 초보적인 이해도 진화를 통해 갖췄다. 하지만 우리는 정의로운 아기보다 나은 존재다. 우리 도덕성의 결정적인 부분- 따라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많은 부분 - 인류 역사 개인 발달의 과정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의 동정심, 우리의 상상력, 그리고 우리의 굉장한 이성 능력의 산물이다."

이 책은 진화심리학이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선과 악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책이다. 강력 추천 목록에 올려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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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생각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라기에 관심을 가지고 손에 잡았지만 서문만을 읽고 그만 두었다. 그 이유는 서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사적 간주곡이라는 두 장을 추가함으로써 이 책의 무게 중심도 이전 판에 비해서는 좀 더 과거 쪽으로 쏠리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나쁠 것은 없으리라고 본다. 요즘에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최신의 과학 연구나 인기 있는 이론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미래만을 내다보고 달려가다 보면 과거의 지혜를 잊어버림으로써 - 혹은 단순히 무시함으로써 - 편협한 현재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저자는 서구의 사상의 전통에 충실하다. 그래서 정신과 육체를 별개로 보는 이원론을 전제로 한 서구의 사상의 전통에서 출발점은 거의 항상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의 시조들이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이 정신과 육체가 별개의 것이라는 이원론을 확고하게 폐기시킨 오늘날,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 사고의 전개는 오류일 따름이다. 그런데 저자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생각들을 10개의 장으로 나눈 다음 고작 한개의 장에 과학에서의 진화론을 할당해 놓았다. 그 말은 물질을 다루는 과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단지 생각의 여러 갈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동안 진화론에 대한 공격의 선두에는 거의 항상 종교가 있었다. 그러니 소위 말하는 인문학자들은 그 싸움을 불구경하듯 보면서 진화론에 입각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발견들을 '형이하학'이라고 치부할 뿐이다. 그러나 종교가 가지고 있는 딜레마를 인문학도 같이 가지고 있다. 진화론이 더 많은 것을 설명하면 할수록 그동안 사상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2천년 가까이 지탱되어온 것이 존립 근거를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으면서 자랐다. 나는 공학도여서 인문학에 대한 동경이 내내 있었다. 그래서 철학 사상에 관한 책을 적지 않게 섭렵했다. 또 종교에 귀의한 적도 있어서 특히 기독교에 관한 책도 제법 읽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많은 독서를 통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항상 존재했으니 그것은 '진리란 무엇인가?'였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만 할 뿐 진리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 곳은 없었다. 단지 신의 권위를 빌리거나 그 시대의 사회적 권위자의 권위에 기대어 '진리란 이런 것이다.'라는 선언만 있을 뿐이었다. 이 책의 저자도 같은 과정을 밟고 있지만 어느 때의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했고, 또 이어지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고, 이런 식의 논의가 끝없이 이어질 뿐 한편으로 보면 그럴듯하나 다른 편에서 보면 모순인 상황은 변함이 없다. 이즈음에서 다시 한번 질문을 해 보자. '영원한 본질'이란 과연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인가? '도'란 과연 무엇인가? '이성'이란 무엇인가? 수천년 동안의 사상사에서 무수히 많은 현인들이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하려 했으나 큰 틀에서 서양의 경우 그리스 철학, 동양의 경우 공자, 맹자의 선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란한 수사학만 발전했을 뿐 여전히 그 먼 옛날의 논의를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꽤 오랫동안 그 서구의 전통이라는 틀에서 벗아나질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서구의 사상적 전통에 기대지 않고, 과학적으로 규명된 사실만 가지고도 이원론을 폐기 처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도 논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란츠 부케티츠가 '자유의지 - 그 환상의 진화'에서 언급했듯이 '자유의지'라는 관념이 환상이긴 하지만 그 환상이 한동안 인간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문화 진화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고 했다. 철학 사상의 전통이라는 것도 이제와서 보면 비록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긴 하지만 의식을 가지고 있고 호기심이 강한 인류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을 것이고 또 그래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 사상의 전통이라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이해가 깊어지고 있는 지금 그 전통을 여전히 따를 수는 없다.

또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좀 이상한 제목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안다. 불행하게도 교양을 쌍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으나, 교양인들은 교양이란 무엇보다 '오리엔테이션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들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양이 있다는 것은 어떤 책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신속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책을 다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 능력이 뛰어날수록 문제의 책을 읽을 필요성이 덜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대충 훓어본다고 해서 책에 대한 평을 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고전을 읽으면 읽지 않는 것 보다는 더 좋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고전을 많이 읽으면 말과 글이 풍성해지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고전을 꼭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과거의 지혜를 잊을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으나 그 우려가 방향 설정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제는 과학과 인문학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있으므로 과학책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관한 타당한 설명을 하는 그런 책들을 더 많이 읽어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가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철학사 읽듯 이 책을 한번 읽어볼 가치는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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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사상사, 인간의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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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아하자 2016.01.11 22: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 '진리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는 별로 관심없어요... 그런 질문에 관심있었다면 종교를 가졌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종교에 대한 책을 좀 본 결과 교리 자체가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다른 종교들과 싸우려고만 해서 그다지... 특히 기독교가 그런듯... 오히려 '내가 왜 사는가' 에 관심이 많았던듯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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