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a beautiful world!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를 기대하면서

독서

다시 만들어진 신 - 스튜어트 카우프만

thinknew 2016. 10. 25. 21:05


이 책의 제목만 보고 저자가 신 또는 종교를 옹호하려 할 것이다라고 짐작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틀렸다. 저자는 종교가 쇠퇴하는 시기에 우리가 믿을만한 무엇을 새로 만들자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언급에 저자의 의도가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책의 핵심 목표는 현실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찾고 그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는 것이었다. 과학과 종교의 공통 기반을 찾아서 다 함께 신성을 재발명하는 것이었다."

저자가 재발명하고자하는 신성은 다음과 같다.
"신성을 재발명하는 것은 부단한 창조성을 내뿜는 이 창발적 우주에서 우리가 무엇을 신성하다고 여길 것인가 선택하는 일이다."
"무신론자이든, 부단한 창조력을 발휘하는 이 우주에 처음으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은 창조주를 믿는 신앙인이든, 모두가 자연의 창조성에서 신성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자는 '혼돈의 가장자리'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복잡성의 대가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자연의 창조성이란 복잡계에서 나타나는 창발성을 주로 의미한다. 그리고 기존 종교를 되살리려는 의도는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생명에 창조주의 간섭은 필요없다. 생명은 우주 본연의 창조성이 자연적으로, 창발적으로 표현된 결과일 뿐이니까"

저자는 종교계가 과학의 진전, 특히 진화론의 진전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진화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이다. 그들은 진화를 비도덕적인 교리로 간주한다. 자신들이 소중하게 지키려는 가치를 진화가 훼손할 것이라고 걱정한다. 진화가 참이라면 서구 문명의 윤리적 기틀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자연의 창조성을 신성으로 여기자는 저자의 제안은 저자의 희망과는 달리, 무신론자에게는 통할 수 있어도 위와 같은 우려를 가지고 있는 신앙인들에게는 통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아무튼 저자는 새로운 신성의 발명을 추구하는 글의 서두를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한다.
"환원주의를 가장 간결하게 표현한 말은 19세기 초에 피에르 시몽 마르키스 드 라플라스(Pierre Simon Marquis de Laplace, 1749-1827년)가 했던 말일 것이다. 라플라스는, 우리가 우주 속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속도를 알고 우리에게 충분한 지능이 있다면, 우주의 미래와 과거를 전부 다 계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 1933년-)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다. "설명의 화살표들은 모두 아래를 가리킨다. 사회에서 사람으로, 기관으로, 세포로, 생화학으로, 화학으로, 결국에는 물리학으로." 와인버그는 이런 말도 했다. "우리가 우주를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주는 더 무의미해 보인다.""
"갈릴레오와 뉴턴 이래로 서구 과학을 점령하여 사실만 가득하고 가치가 사라진 무의미한 세상을 만든 환원주의, 그 환원주의의 한계를 새롭게 드러내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한 가지 목표이다."

이런 언급들을 보면 저자가 환원주의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저자는 과학자여서 과학의 바탕이 환원주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지난 300여 년 동안, 환원주의 모형은 물리학은 물론이고 그 너머의 영역에서도 여러 획기적인 이론들과 성공들을 만들었다. 나는 환원주의를 넘어서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학에 큰 도움이 되는 그 힘을 완전히 포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즉, 저자는 '환원주의를 넘어선다'는 말을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하지만 그 의미가 환원주의를 버리고 다른 무엇을 취한다는 의미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자연의 창조성에서 신성을 새롭게 찾아내자라고 제안하는 것은 다분히 과학 내부의 헤게모니 다툼에서 물리학의 반대편에 서겠다는 의도로 읽힐 수 있다.
"과학은 생각보다 훨씬 더 제한적이다 우주의 창조성은 미리 말해질 수 없고 예측될 수 없다. 과학이 지식과 이해로 가는유일한 길도 아니다. 인간의 행동과 발명에 드러나는 복잡하고 맥락 의존적이고 창조적이고상황적인 속성들, 그리고 인간을 포함하며 부분적으로 인간을 규정하는 역사성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언급에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저자는 과학을 물리학으로 좁게 설정하고 그 물리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기를 든 것으로 볼 수 있다.

과학 내부의 헤게모니 다툼에 대해서는 약간의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뉴턴 이래로 과학은 물리학을 의미했고, 물질계의 자연 법칙이란 중력의 법칙에서 출발하여 지금은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생물학에서는 진화론이 등장하여 생명 현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을 물리학의 법칙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래서 진화론자들은 생명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환원론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카오스 또는 복잡성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복잡성은 물리학에서 출발한 개념이지만 점점 더 생명 현상을 설명하는데 더 적합한 개념임이 드러나게 된다. 여러 새로운 개념들의 지원에 힘입어 진화론, 즉 자연선택은 자연 법칙으로서의 지위를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연구가 점점 더 진전됨에 따라 자연선택이 물리계까지도 포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저자가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창발적이며 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자기 조직화라는 개념은 비단 생명의 기원에만 국한되는 원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헤게모니 다툼이 물리학과 생물학의 대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물리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그것은 유기체를 설명하는데 물리학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지 그 유기체가 원자로 구성되어 있고 그 원자들의 작동 방식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과학자의 입장을 결코 벗어나지 않고, 또 자연의 창조성을 신성으로 취급하자고 주장하면서 책의 제목을 저렇게 붙인 것은 좀 의아하다. 제목에서 보이는 의아함을 걷어내고 나면 이 책은 진화론의 자연선택에 '자기 조직화'라는 강력한 보조 개념을 추가하는데 기여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진화경제학을 포함한 진화심리학 분야의 책을 좀 읽어본 독자라면 이 책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이 그것들과 중복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