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new :: 인종차별의 역사 -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사회에는 다양한 차별이 존재한다. 이런 '차별의 있음'은 생물의 다양성에서 일정 정도의 논리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사회의 진보를 추구하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이것은 딜레마에 해당된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의 경쟁은 애초부터 불공정 경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진보해 왔고, 또 진보해 갈 것이다. 그 진보 속에 차별의 철폐도 포함됨은 물론이다. 모든 차별을 다루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에 인종차별로 범위를 좁혀서 그것의 출발점, 진행되어 온 과정, 그리고 철폐를 위해 사람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것 등을 다룬 책이 바로 다음에 요약할 '인종차별의 역사'이다.


저자는 인종차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종차별이란 타자로서의 타자에 대한 증오다. 흑인으로서의 흑인, 경찰관으로서의 경찰관, 동성애자로서의 동성애자에 대한 증오 말이다."
"인종차별은 또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며, 감정과 무관한 지적 태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태도의 핵심은 뭘까? 그것은 의식될 때도 있지만 대개는 감춰져 있는 어떤 믿음이다."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즉 18세기의 철학자들이 믿었던 것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진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잘못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계몽주의만으로는 어둠을 흩뜨릴 수 없다. 따라서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인종차별은 잘못된 믿음이라고 아무리 되풀이해서 말해준다고 해도 그들은 문제의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인종차별주의가 자기한테 정말로 필요 없게 될 때에만, 즉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을 덮친 어려움들을 직면하고, 또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만 인종차별주의를 포기할 것이다. 요컨대 인종차별은 생물학이 발전하거나 더 많이 연구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생활이 주는 수많은 위협들에 대해서 인종차별주의가 단연코 좋은 해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류가 이해할 때라야 인종차별은 사라질 것이다."
"인종 차별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문제들이 어떤 유형이었는지를 이해하고 싶다면 인종차별의 굽이진 실제 역사 속으로, 시대가 흐르면서 복잡해지는 그 변화 속으로, 사회, 문화적인 그 다양한 모습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어째서 그 해결책들이 전혀 적절하지 않았는지를 그에 대해 의심하는 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


저자는 고대에 존재했던 여자, 아이, 노예에 대한 차별에 대한 역사를 서술하고 이어서 중세에 존재했던 차별과 근대 이후에 과학이라는 외피를 두른 차별을 구분하여 서술한다.
"실제로 중세 초부터 르네상스 말에 이르는 동안 유대인과 카고, 인디언 그리고 흑인에 대한 반감은 유사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가끔 겹치기도 하지만 서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들 간에는 '공통의 줄기'나 관념적인 '접착제'가 없다. 따라서 엄밀하게 봤을 때, 인종차별의 이러한 여러 형태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근대 과학이 성립되기 이전와 특수한 방식을 따르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인종차별 원형'의 경우는 제외한다면, 모두 대단히 비합리적인 성격의 집단적 믿음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6세기 말에서 18세기 말 사이에 완전히 바뀐다.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합리적 규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공들여 만들고 이어서 갈릴레이를 선두로 한 새로운 실험과학의 영향 하에서 전반적인 재검토와 수정이 이루어진 사고규범)을 지배적인 규범으로 삼게 되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러한 이성의 승리가 비이성적 믿음들을 사라지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비이성적인 믿음들을 '이성적'으로 보이게끔 만들고 '개념적' 언어로 다시 표현하며 그 믿음들에 부족했던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써 그러한 믿음들을 새롭게 되살리는 경향을 보인다."
"계몽주의시대의 철학자들과 학자들은 세상을 '논리적으로' 질서정연하게 만들겠다는 열정적이고 종종 광신에 가까운 의지를 갖고 있었고 강박적으로 모든 것을 분류하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해묵은 인종차별적 믿음에 관념적인 일관성을 부여하는 데 기여했고, 그러한 일관성은 추상화하기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인종차별적 믿음에 매력을 느끼게 할 여지가 있었다."
"19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지성의 영역에서 일어난 이 첫 번째 자극에 감성의 영역에서 일어난 두 번째 자극이 더해진다. 바로 낭만주의적 자극이다. …… 낭만주의가 지금 여기의 세계에 대한 불만족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면, 낭만주의적이라고 일컬어 지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장차 이 실제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거나 (그래서 이 세계에 능동적으로 헌신하거나), 아니면 더 나은 세계는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지나간 과거에 존재했다고 믿는 (그래서 비록 절망에 빠지지는 않더라도 향수에 젖어서 사는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적인 차원만 보자면, 이 두 가지 심리적 태도는 19세기 내내(그리고 그 이후까지도) 상반된 두 개의 사상계를 통해서 표현된다. 첫 번째는 '진보주의적' 계열이다. 이 계열은 계몽주의 시대의 정점을 찍었던 대혁명들(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찬미하는 사람들과 지식의 발전뿐 아니라 사회의 발전까지도 믿는 사람들 그리고 특히 다양한 사회주의 학설의 신봉자들('공상적' 사회주의자, 마르크스 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을 하나로 결집한다. 두 번째 계열은 '반동적' 계열이다. 이 계열은 프랑스 내에서는 프랑스혁명 이전의 구체제에 대한 향수를 지닌 사람들과 프랑스 밖에서는 프랑스혁명의 원칙들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을 불안해하거나 그것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기는 하지만 매우 유감스러워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모은다."
"'진보주의자들'과 '반동주의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낭만주의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고양된 감수성은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가들이 이성적이고 사이비과학적인 모습으로 포장해 놓은 인종차별적인 관념을 지지하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성주의와 낭만주의는 같이 힘을 모아서 인종차별의 망상을 키운다. 이러한 첫 번째 역설에 두 번째 역설이 더해진다. 인종차별적인 망상은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그것이다. 사실 '진보주의자들'과 '반동주의자들'은 인종차별적 망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초창기 과학이 어떻게 인종차별에 악용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래서 골턴이 창안한 '사회다윈주의' 를 바탕으로 별개의 두 각본이 나온다. 하나는, 자연선택은 질적으로 우월한 인종에게 유리하계 작용하고, 따라서 내버려둬야 한다는 것이다(야만적 자본주의, 식민지 개척, 제국주의 등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 초자유주의적인 담화들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하나는, 자연선택은 양적으로 가장 수가 많은 인종, 즉 열등한 인종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따라서 국가가 생물적인 번식 체제에 적절하게 개입해서 자연선택을 저지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골턴은 우생론을 권장하는 데로 귀착되는 바로 이 두 번째 해결책에 동조한다."

그리고 인종차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사건, 바로 히틀러에 의한 홀로코스트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반면에 어떻게 해서 이 책(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또는 히틀러 지지지들의 또 한 권의 애독서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나치당 정치가이자 인종 이론가,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되었다; 편집자)의 <20세기의 신화>(1930년)가 -1930년대 초에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와 같은) 교양인들은 물론이고 독일 여론에 국가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열광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는지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대자본가든 소시민이든 가릴 것없이 독일 중산계급이 공산주의에 대해 느꼈던 두려움이다. 광범위한 내홍에 시달리던 소련은 혁명의 전파가 아닌 전혀 다른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근거가 없는 두려움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특권을 잃는다는 생각에 극도로 당황하고, 바이마르공화국은 무력해서 모스크바가 구상한 볼셰비키의 공세로부터 독일을 지켜 줄 수 없다고 확신한 중산계급은 구원자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가 어떤 대가를 요구하든 무조건 믿을 준비가 돼 있었다. 그것은 히틀러에게는 행운이었을 것이다.""그것은 또한 고대사회 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적 태도에 의해서도 설명이 되는데, 이러한 문화적 태도는 기독교에 의해서 계승, 발전되며, 생물학에 바탕을 둔 계몽주의 시대의 사이비 합리주의에 의해서 형태가 갖춰지고, 마지막으로 낭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적 민족주의에 의해서 독일에서 심화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사 지식에 의하면 2차 대전이 끝나고 프랑스에서는 드골에 의해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청소가 있었다. 그러나 이 지식에 약간의 오류가 있음이 저자의 설명에 의해 드러난다.
"1945-6년에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이 꽤 있었고 비록 '숙청'이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불충분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더라도, 불완전하게 끝난다. 우선, 정치 행정조직에 범죄자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 모두를 기소하다가는 자칫 조직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그들에 대한 기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샤를 드골 장군이 지나치게 숙청에 집착하지 않고 적절한 순간에 굴신할 줄 알았던 과거의 대독 협력자들(모리스 파동)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과, 교활한 '비시 정권식' 사고 방식이 여러 해 동안 대학과 사법기관, 경찰, 군대에 남아 있게 된 데에는 이런 곡절이 있다. 다음으로, 당시의 승리자들인 '자유 프랑스'(France Libre. 드골 장군의 주도로 1940년에 설립된 망명정부; 옮긴이)의 드골파와 국내에서 활동한 과거의 레지스탕스 활동가들(요컨대 공산주의자들)은 지난날의 적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보복을 함으로써 프랑스를 이분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이념과 마찬가지로 드골파의 이념에서도 공화제의 합법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자코뱅파(프랑스 혁명 이후에 중앙집권적인 공화정을 주장했던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정치 분파; 옮긴 이)적인 염려가 이런저런 '소수 집단'(특히 1939년과 마찬가지로 1945년에도 여전히 유대인들을 정의하는 용어인 '종교적' 소수집단)에 대한 보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이민자들 혹은 외국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 또는 오류를 열거해 두었는데, 이게 현재의 우리에게도 생각해 볼 거리를 제공한다.
1) 이민에는 넘어서는 안될 관용의 한계가 있다. (틀려다.)
2) 현재 프랑스는 관용의 한계를 넘어섰다. 달리 말해서, 오늘날에는 과거보다 외국인이 더 많다.(틀렸다.)
3) 프랑스는 이 이민자들이 다 필요 없다.(틀렸다.)
4) 이민자들은 프랑스인들의 몫을 뺏는다.(틀렸다.)
5) 이민자들은 위험할 지 모른다.(틀렸다.)
6) 남쪽에서 온 이민자들(말하자면, 흑인들과 아랍인들)은 동화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 다른 사람들처럼 프랑스인이 되지 않을 것이다.(틀렸다.)
7) 이민자들은 그들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틀렸다.)
8) 당연히 외국인들보다는 우리 이웃들에게 더 나은 대우를 해야 한다.(틀렸다.)


저자는 이런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철학자들과는 달리 현학적이거나 과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까? 기적 같은 해결책은 분명 없다는 사실을 안 이상, 희망을 걸 수 있는 길은 다양한 차원에서 수렴 행위들을 더 많이 늘려가는 것 밖에 없다."

저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타자의 행위가 아니라 (젊은이, 여자, 동성애자,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등의) 속성에 대한 평판에 근거해서 타자로서의 타자를 증오하는 모든 형태는 이제 인종차별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나의 논거란? 두 가지다. 한편으로는, 인류 안에는 객관적인 '인종'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상의 혹은 실제의- 다른 하위 범주들에 대한 증오의 형태에 대해 '인종차별'이라는 명칭을 부정할 수 있는 어떠한 객관적인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앞서 다룬 수많은 예들을 통해서 봤듯이) 예를 들어 종교적인 증오처럼 처음에는 비인종적인 성격을 띤 증오가 어느 순간 결국에는 거의 항상 인종차별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 두 번째 결론은 정치적인 차원에 속한다. 사람들은 인종차별주의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가끔은 무지해서, 대개는 악의에 의해서."

이 책에는 '인종이란 없다'라는 점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진 않지만 저자는 그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역사는 필엱적으로 해석을 포함하지만 그 해석의 근거가 과학적이어야 함을 보여준 또 한권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여타 인문, 철학 책의 저자들이 흔히 내리는 현학적이거나 선언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도 한 이 책은 강력 추천 목록에 올려야 마땅하다.


Posted by think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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