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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역사란 무엇인가? - E. H. 카 II

thinknew 2017. 1. 13. 17:26



지난 포스트에서는 역사학이 당면했던 이원론적 관점에서의 편향과 그것을 극복하는 역사가의 자세에 대해서 주로 요약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에 대한 저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요약한다.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 앵카레 (1854-1912)는 <과학과 가설> …… 푸앵카레의 주요한 논지는, 과학자들이 제출한 일반명제들은 그것들이 단순한 정의(定義)이거나 또 다른 형태의 용어 사용에 관한 규칙이 아닌 한, 사유의 진전을 구체화하고 체계화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가설이며, 따라서 증명과 수정과 반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과학자나 역사가 모두 보다 겸손한 희망, 즉 자신의 해석을 매개로 하여 사실을 분리하고 그 사실로써 자신의 해석을 검증하는 가운데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로부터 또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로 점진적으로 나아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역사가는 항상 자신의 증거를 검증하기 위해서 일반화를 이용한다."
"현재 사회학은 두 가지의 서로 상반 되는 위험- 지나치게 이론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위험과 지나치게 경험적인 것으로 되어가는 위험 -에 직면해 있다. 첫번째 것은 사회 일반에 대한 추상적이고 무의미한 일반화에 몰두하는 위험이다. 대문자 S로 시작되는 사회(Society)는 대문자 H로 시작되는 역사(History)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생각이다. 이 위험은 역사가 기록한 특수한 사건들을 일반화하는 것을 사회학만의 독점적인 임무로 삼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 가깝게 다가서 있다: 심지어 사회학은 '법칙'이 있기 때문에 역사학과 구별된다는 주장마저 제기되어 왔다."
"사회학은 역사적 사회들을 다루며, 그 사회들 하나하나는 특수한 것으로서 특정한 역사적 내력(來歷)과 조건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러나 사례 나열과 분석에 관한 이른바 '기술적인' 문제에 틀어박힘으로써 일반화와 해석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단지 정지된 사회의 무의식적인 옹호자가 되겠다는 것일 뿐이다."
"사회학이 쓸모 있는 연구분야가 되려면, 역사학과 마찬가지로,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의 관계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사회학은 또한 역동적인 학문- 정지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왜냐하면 그런 사회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관한 연구 -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 이른바 과학의 법칙이란 실제로는 경향에 관한 설명, 즉 다른 조건이 동일할 경우에 또는 실험실의 상태 속에 있을 경우에 무엇이 발생할 것인가에 관한 설명이다."
"현대물리학 이론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을 개연성만을 취급한다고들 말한다. 오늘날의 과학에서는 귀납법이 논리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란 그저 개연성이나 합리적인 신념일 뿐이라는 점을 잊지 않으려는 경향이 더욱더 증대하고 있으며, 또한 과학 상의 성과들을 오직 특수한 작용에서만 그 타당성이 검증될 수 있는 일반적인 규칙이나 지침으로 간주하려는 생각도 더욱더 강해지고 있다."
"인간은 어디로 보나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복잡한 자연의 존재물이며, 그래서 당연히 인간의 행위에 대한 연구에는 자연과학자들이 직면하는 어려움과는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사회과학자, 역사가, 자연과학자의 목표와 방법이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점일 뿐이다."
"관찰의 과정이 관찰되고 있는 것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변화시키기도 한다는 것 또한 진리이다."
"원칙적으로 나는 역사가의 연구방법과 과학자의 연구 방법을 갈라놓고 있는 그 차이들을 넓히기보다는 좁히기를 바라 고 있지만, 그렇더라도 불완전한 유사성에 의존하여 이 차이들을 감쪽같이 감추려고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과학이란 용어에는 수많은 다양한 방법과 기술을 이용하는 다양한 지식 분야들이 포괄되어 있으므로, 역사를 과학에 포함시키려고 하는 사람들보다는 역사를 배제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의미심장한 것은 그 배제해야 한다는 논의가 자기들만의 특별한 동아리에서 역사가들을 배제시키고 싶어하는 과학자들이 아니라 인문학의 한 분야로서의 역사의 지위를 옹호하고 싶어하는 역사가들이나 철학자들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학자, 사회과학자, 역사가는 분야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동일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과 환경에 관한, 다시 말하여 환경에 대한 인간의 그리고 인간에 대한 환경의 영향에 관한 연구이다. 연구의 목표도 동일하다: 그것은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지배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물리학자, 지질학자, 심리학자, 역사가의 전제와 방법은 세세한 부분에서는 크게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역사가가 더 과학적이기 위해서는 더욱 충실하게 물리학의 방법을 따라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역사가와 자연과학자는 설명해야 할 기본적인 목적과 문제를 제기하고 대답하는 기본적인 방법에서는 똑같아진다."
"역사가는 과거를 이해하려는 충동을 가진 까닭에 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답변들을 단순화하는 일, 답변들의 상하관계를 정하는 일, 혼잡한 사건과 혼잡한 특수한 원인에 일정한 질서와 통일을 부여하는 일 등을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가가 원인을 다양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단순화하는 작업도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역사도 과학과 마찬가지로 이렇듯 이중적이면서 명백히 모순적인 과정을 통해서 전진하는 것이다."
"역사가와 그의 원인의 관계는 역사가와 그의 사실과의 관계와 똑같이 이중적이고 상호적인 성격을 가진다. 원인은 역사과정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을 결정하며, 그의 해석은 원인에 대한 그의 선택과 배열을 결정한다. 원인의 등급화, 즉 어느 하나의 원인이나 어느 일련의 원인들 혹은 또다른 일련의 원인들의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려내는 것이 그의 해석의 핵심이다." "과학자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역사가의 세계도 사진을 찍어놓은 것과 같은 현실세계의 복사판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역사가가 효과적으로 현실세계를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작업 모델이다."
"절대적 진리라는 개념 역시 역사의 세계에는 부적합한 -아마 과학의 세계에도 그러리라고 생각되지만- 것이다."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을 강조한다는 것은, 그동안 역사학이 포함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인문학의 문제에 대한 언급을 필수적으로 필요로 한다.
"17세기와 18세기 그리고 19세기 내내 지배적이었던 고전적인 인식론들은 모두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라는 뚜렷한 이분법을 전제했다. 철학자들이 구성한 모델은 인식의 과정이야 어떻든지 간에 주체와 객체, 그리고 인간과 외부세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난 50년 동안 철학자들이 그 인식론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여, 인식 과정은 주체와 객체를 뚜렷하게 분리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그것들의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을 일정한 정도까지 포함하는 과정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과학에 대해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나는 맨 처음의 강연에서 역사연구는 전통적인 경험주의의 인식론과 조화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이제 나는 사회과학 전체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인, 검사자이면서 동시에 검사대상인 인간과 관계하므로, 주체와 객체의 엄격한 분리를 선언하는 어떤 인식론과도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 편견에 따르면 인문학은 지배계급의 폭넓은 교양을 일컫는 것으로, 그리고 과학은 그 계급에게 봉사하는 기술자의 기능을 일컫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인문학(humanities)'과 '인문적(humane)'이라는 용어들은 그 자체가 낡은 편견의 유물이다."


서구의 문제이긴 하지만 역사에 신의 뜻이 개입하는 것도 정당하지 않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진지한 천문학자가 된다는 것과 우주를 창조하고 정돈한 어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양립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제멋대로 행성의 경로를 변경시키려고, 일식이나 월식을 지연시키려고, 우주의 운동 규칙을 바꾸려고 끼어드는 어떤 신을 믿는다는 것과는 양립할 수 없다."
"다시 신부(1888-1976. 영국의 카톨릭 사상가) …… "어떤 연구자든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역사의 모든 문제에 대답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현세의 사건들과 인간의 드라마를 최대한 말끔하게 처리하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더 폭넓은 성찰을 이끌어들이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역사의 완결성은 역사의 의미와 중요성을 좌우하는 어떤 초역사적인 힘- 그 힘이 선택받은 사람들의 신이건, 기독교의 신이건,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의 보이지 않는 손이건, 아니면 헤겔의 세계정신이건 간에 -에 대한 신념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본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역사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 입장권을 제공받는 경우란 결코 없다. 역사가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신학자 이상으로 결정적인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도 역시 보다 덜한 악과 보다 큰 선이라는 명제에 의지한다."


역사는 변화여서 진보를 정의하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따른다.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역사란 투쟁의 과정이며 그 과정 속에서의 결과는, 우리가 그것을 좋다고 판단하건 나쁘다고 판단하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그러나 간접적인 경우보다는 직접적인 경우가 더 많은데- 다른 집단들을 희생시킨 어떤 집단들이 성취하 는 것이다. 패배자들은 대가를 치른다. 재난은 역사에 고유한 것이다. 역사의 모든 위대한 시대에는 그 시대의 승리자뿐만 아니라 희생자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더 작은 악을 선택하는 일에, 혹은 어쩌면 선을 낳을지도 모를 악을 행해야 하는 일에 우리가 때때로 인정하고 싶어하는 경우보다 더 자주 말려들고 있다. 역사에서는 이 문제가 '진보의 대가'라든가 '혁명의 보상'이라는 특별한 제목 아래 종종 토의되고 있다. 이것은 잘못이다. 베이컨이 <혁신론>이라는 논설집에서 말하고 있듯이, '인습의 완강한 유지는 혁신만큼이나 난폭한 것이다.' 특권이 없는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보수(保守)의 대가는 특권을 빼앗긴 자들에게 부과되는 혁신의 대가만큼이나 무거운 것이다. 누군가의 행복은 다른 누군가의 재난을 정당화한다는 명제는 모든 통치형태에 잠재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급진적인 것만큼이나 보수적인 교리이다."
"달리 비유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역사나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도덕적 교훈들은 은행의 수표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인쇄된 부분과 써넣을 부분이 있다. 인쇄된 부분에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민주주의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이 있다. 이 단어들은 필수적인 범주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에게 얼마나 많은 자유를 배당하려고 하는가, 우리가 누구를 우리와 동등한 사람들로 인정하는가, 게다가 어느 정도까지 인정하는가 등을 말해 주는 또 다른 부분을 채워넣을 때까지 그 수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우리가 때때로 수표에 기재하는 방식이야말로 역사에 관한 문제이다. 추상적인 도덕적 개념에 특정한 역사적 내용이 담겨지는 그 과정은 하나의 역사적 과정이다; 정말이지 우리의 도덕적 판단은 그 자체가 역사의 산물인 어떤 개념적 틀 안에서 내려진다."
"진정한 역사가란 모든 가치의 성격이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것임을 인정하는 사람이지,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야말로 역사를 초월하는 객관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다." "역사의 종점을 가정하는 것은 역사가보다는 신학자에게나 더 어울릴 법한 종말론의 냄새를 풍기며, 역사의 밖에 목표를 두는 오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정해져 있는 종점이란 것은 확실히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당긴다; 그리고 역사의 진행을 자유를 향한 끊임없는 진보로 보았던 액턴의 견해는 냉랭하고 막막하게 보인다. 그러나 만일 역사가가 진보라는 가설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는 기꺼이 진보라는 것을 계속되는 여러 시대의 요구사항과 조건에 의해서 각 시대만의 특정한 내용이 채워지는 과정으로 간주해야만 하리라고 생각된다."
"분별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역전과 일탈과 중단 없이 곧장 일직선으로 전진한 그런 종류의 진보를 결코 믿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가장 급격한 역전조차도 반드시 그 믿음에 치명타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보는 모든 사람에 게 똑같고 동시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의미할 수도 없다. 의미심장한 것은 요즈음의 저 몰락의 예언자들 거의 모두가, 다시 말해서 역사에서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한 채 진보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저 회의주의자들 거의 모두가 몇 세대 동안 문명을 전진시키는 일에서 지도적이고도 두드러진 역할을 의기양양하게 수행했던 바로 그 지역이나 사회계급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다."
"19세기의 사상가들은 흔히 역사의 진보에는 일정할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규정될 수도 있는 어떤 목적이 있다는 관념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했지만, 그 관념이 적합하지도 않고 쓸모도 없다는 것은 이미 밝혀졌다. 진보에 대한 신념은 자동적이거나 필연적인 과정에 대한 신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력의 부단한 발전에 대한 신념을 의미한다. 진보는 추상적인 용어이다; 그리고 인류가 추구하는 그 구체적인 목적들은 그때그때마다 역사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역사의 밖에 있는 어떤 원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인간의 완전성이나 미래의 지상천국을 믿지 않는다. 이 정도까지라면 나도 역사에서는 완전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과 신비주의자들에게 동의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것을 향해 전진해야만 밝혀질 수 있고, 획득하는 과정 속에서만 그 타당성이 입증될 수 있는 목표들을 향해서 나아가는 무한한 진보- 바꿔 말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거나 상상할 필요가 있는 어떠한 한계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진보 -의 가능성에 찬성할 것이다. 그리고 얼마간이라도 그러한 진보의 개념이 없이 어떻게 사회가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역사과정에서 눈에 띄는 모든 발명, 혁신, 새로운 기술에는 그 긍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부정적 측면도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400년 동안의 영어사용권 세계의 역사가 역사상 위대한 시기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역사를 세계사의 중심으로 취급하고 그 밖의 모든 역사를 주변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관점의 부당한 왜곡이다."


그리고 저자는 서두에서 밝혔던 이 책을 쓰게 된 목적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글을 맺는다.
"그러나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영어사용권 세계의 지식인들과 정치사상가들 사이에서 이성에 대한 신념이 약화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에 대한 그 충만한 감각이 상실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언뜻보기에는 역설적인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서 진행되는 변화에 관한 피상적인 이야기들이 요즘처럼 자주 들렸던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변화가 더 이상 성취로, 기회로, 진보로 생각되지 않고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정치 및 경제 전문가들이 처방을 내릴 때, 그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란 급진적이고 원대한 이념은 믿지 말라는 훈계, 혁명의 냄새가 나는 것은 모조리 피하라는 훈계, 또는 -만일 우리가 전진할 수밖에 없다면- 가능한 한 천천히 조심스럽 게 전진하라는 훈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세계의 모습이 지난 400년간의 그 어느 때보다 더 급속하고 더 철저하게 변화하고 있는 이때에, 그런 처방은 일종의 굉장한 무지라고 생각되거니와, 그 무지 뒤에 들어서는 것은 세상이 멈춰버릴 것이라는 불안감이 아니라 이 나라가 -아마 다른 영어 사용권 나라들까지도- 전반적인 진보에 뒤쳐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리고 무기력하게 또한 체념한 채로 어떤 향수 어린 침체상태에 빠져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인 것이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나는 여전히 낙관론자이다; ...... 나는 격동하는 세계, 진통하는 세계를 내다보고 나서 진부하기 조차 한 어느 위대한 과학자의 말을 빌려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래도 - 그것은 움직인다.""

이 책은 줄곧 인문학 고전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학을 과학으로 본다. 그리고 그 견해는 타당하다. 그래서 인문학 고전 중에서도 실제로 읽어 보아야 할 진짜(?)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프스트에서 상당한 내용을 요약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읽어 볼 필요가 충분하다. 강력 추천 목록에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