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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바른 마음 - 조너선 하이트 II

thinknew 2016. 12. 14. 15:05


지난 포스트에 이어 책에 대한 논의를 이어 가면 다음과 같다.

논증으로서도 부실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보수가 가지고 있는 가치들은 인간의 권리라는 개념이 아예없던 시절에도 통용되는 그런 것들이었다. 그에 비해 진보는 극소수의 지배 계급에만 존재했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피지배계급에게 되돌려 주는 쪽으로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진보가 된 것이다. 이쯤에서 저자가 직접 언급한 보수와 진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자.
"이데올로기를 간단히 정의 내리라고 한다면, "무엇이 적합한 사회 질서이고, 그것을 어떻게 이룩할 것인가에 대한 일련의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관련해 가장 기본적으로 묻는 질문은 "현 질서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바꿀 것인가?"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의회에 모인 각계 대표들은 질서 유지를 원할 경우 우측에, 변화를 원할 경우 좌측에 앉았다. 이때부터 우와 좌는 각각 보수와 진보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사람들에게 변화에 저항하는 심리가 내재해 있다는 심리학에서의 연구 결과를 같이 생각해 보면 진보는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가 아니라 두루뭉술한 개념으로서의 보수와 진보를 동일선 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저자가 진보에 대해 우려하는 부분이 전혀 얼토당토 않은 것은 아니다. 저자는 도덕적 자본이라는 것을 다음과 정의한 다음,
"도덕적 자본은 도덕 공동체를 지탱시켜주는 자원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도덕적 자본이란 어떤 공동체가 가진 미덕, 규범, 관습, 정체성, 제도, 첨단 기술 그리고 이와 맞물린 진화한 심리 기제의 정도를 말한다. 이 둘은 도덕적 체계로서 함께 작용하여 개인의 이기심을 억제하거나 규제하며, 나아가 협동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게 한다."
다음과 같이 언급함으로써 균형을 어느 정도 맞추고는 있긴 하다.
"진보주의는 확실히 적정선을 넘어서는 경향이 있고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고 하며, 고의는 아니더라도 사회에 쌓인 도덕적 자본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와는 반대로 보수주의자들은 쌓여 있는 도덕적 자본은 잘 지켜내지만, 특정 계층의 희생자를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향이 있으며, 모종의 강력한 이해관계에 따른 약탈을 제어하지 못하며, 시대 변화에 발맞추어 제도를 바꾸거나 고칠 줄 모른다."

결국 저자는 도덕감정론을 바탕으로 원론적인 수준에 보수와 진보를 비교하고 있지만 현재 미국(대한민국도 마찬가지지만)에서 일어나고 있는 논란은 보수와 진보가 서로의 도덕적 기반을 이해하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저자도 인용한 다음과 같은 경우를 보자.
"오바마 대통령의 집권 초반, 어느 날 난데없이 티파티 운동이 일어났고 이로써 미국의 정치 지형은 물론 미국 내 문화 전쟁의 판도까지 뒤바뀌었다. 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9년 2월 19일의 일로, 경제 뉴스 전문 방송인 CNBC의 기자 릭 산텔리 (Rick Santelli)가 정부 정책에 일장 연설의 맹공을 퍼부은 것이 계기였다. 애초 갚을 능력이 없음에도 무리하게 돈을 빌려 주택을 산 사람들을 정부에서 750억 달러를 들여 지원하기로 한데 대한 반대였다. 산텔리는시카고 상업거래소 객장에 서서 생중계로 방송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정부는 잘못된 행동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부동산 거품때문에 생긴 경제 문제를 공적 자금을 투입해서 해결하려는 정부의 노력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고 전적으로 경제 문제이다. 게다가 저런 분노에 동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그 때문에 공화당을 지지하면 레이건 이후로 눈에 보이지 않게 부를 축적해 온 부자들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이고 결국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을 위해 투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종교에 관한 논의도 허술하긴 마찬가지다.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슈웨더의 도덕적 주제 중 신성함의 윤리에 의존하여 종교를 옹호하려 한다. 먼저 현대에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과학으로 무장한 무신론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신무신론의 계보: 샘 해리스 종교의 종말, 리처드 도킨스 만들어진 신, 데니얼 데닛 주문을 깨다, 크리스토퍼 허친스 신은 위대하지 않다."

그런 다음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신(새로운)무신론의 입장과 대립각을 이루는 이 모델에 나는 뒤르캠주의 모델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는바 이 모델에서는 종교적 믿음과 관습이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종교 옹호의 주된 논리는 종교가 집단을 유지하는데 긍정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깊은 신앙심이 상보적이면서도 서로 구별되는 세 가지 요소, 즉 믿음·행위·소속감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현재 많은 학자가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종교가 집단의 단결력을 높이고, 무임승차자 문제를 해결하며 집단 차원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하게 해준다는 증거는 현재 학계에 숱하게 나와 있다."
"종교는 진화한다(Darwin's Cathedral)라는 책에서 윌슨은 집단이 서로 단결하고, 노동을 분담하고, 힘을 합쳐 일하고, 나아가 번영을 이룩하는 데 종교가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줬는지 그 모습들을 일일이 나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진화론을 심도있게 연구한 학자답게 다음과 같은 언급도 한다.
"나는 종교가 일련의 문화적 관습이며 , 나아가 그것이 다차원 선택을 통해 우리 안의 종교적인 마음과 서로 공진화해 왔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문제는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종교의 문제는 효용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저자도 언급한 다음과 같은 것 때문이다.
"종교라는 것이 수만 년의 세월 동안 우리 조상들을 갖가지 집단으로 엮어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식으로 엮이는 과정에는 어느 정도는 맹목적인 믿음이 뒤따르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사람, 책, 혹은 원칙이 한번 신성한 것으로 선포되고 나면, 헌신적 추종자들은 더 이상 거기에 질문을 던지지도, 그것에 대해 명확하게 사고하지도 못하니까 말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데니얼 데닛이 '주문을 깨다'라는 책에서 깨고자 한 주문이다. 무신론자들의 주장에 반쯤 동의하면서도 그런 문제는 '어느 정도'라고 이야기하고는 종교의 좋은 점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종교를 옹호한다는 것은 옳은 논증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진화론에서의 집단선택 모델의 옹호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집단선택 모델의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길게 이야기할 순 없지만 인간의 사회성을 계속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집단선택 모델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논증으로서는 빈약하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책은 진화심리학에서 도덕 감정에 관해 언급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면 얻을 것이 많다. 부제에 현혹되지만 않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