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new :: 이것이 생물학이다 - 에른스트 마이어 3

지난 글에 이어서 생물학적 발견들이 어떻게 '정신의 신비'에 접근했는지 알아보자.


"인간 도덕성에 관한 이론만큼이나 1859년의 다윈 혁명으로부터 큰 충격을 받은 것도 없을 것이다. 다윈 이전에는 "인간 도덕성의 근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신이 주신 것이다"였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스피노자와 칸트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모두 이 문제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왔다. "도덕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떤 도덕성이 인류에게 가장 타당한가?" 다윈은 이 같은 심오한 질문들에 대한 그들의 결론에 도전하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도덕성이 신에게서 부여 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근거없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자연주의적 인간윤리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개체들로부터 어떻게 이타적인 행동이 나타나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푸는 일이다."

"즉 개인은 세 가지 상황에서 선택의 단위가 될 수 있다. 개체, 가족의 성원(보다 정확히 말하면 번식자), 그리고 사회집단의 성원이 그들이다. 개인이 단위인 경우에는 헉슬리가 생각한 대로 오로지 이기적인 성향만이 자연선택의 보상을 받는다. 그러나 다른 두 경우에는 집단의 다른 성원들에 대한 배려, 즉 이타주의가 선택된다."

"자식돌보기는 포괄적응도를 높이는 종류의 이타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문제의 행동이 이타주의자의 유전자형에 이득이 되는 한,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이타적 행동이라기보다 이기적 행동이다. 사회생물학 문헌에는 이타적인 행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포괄적응도 를 높여주는, 즉 유전자형의 관점에서 볼 때 궁극적으로 이기적인 행위들에 대한 예들이 엄청나게 많다."

호혜성 이타주의는 간단히 말해서 서로 이득을 주고받는 행위 또는 신세의 상호교환이다.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동물과 선택능력을 지닌 인간 간의 차이가 윤리의 존재를 가르는 선이다. 죄의식, 양심의 가책, 후회, 공포, 또는 동정심이나 고마움 등 도덕적인 판단과 관련있는 행동들에 따라오는 감정들이 인간의 비윤리적이거나 윤리적인 행동에 대한 의식적인 본성을 나타낸다."

"다윈 이전에는 도덕규범들이 신에게서 부여받았거나 아니면 순전히 인간 사고(그 자체도 신에게서 부여받은 것으로 여겼지만)의 결과라는 두 가지 대답이 보편적이었다."

"실제로 만일 모든 인간집단들이 다 똑같은 규범을 가지고 있다면 이롭지 못할 수도 있다. 영아사망률이 높은 원시종족에서는 높은 출생률이 윤리적일 것이다. 한편 과밀국가에서는 자식을 하나 또는 둘 만 가지기로 하는 것이 집단 전체는 물론 각 가족에게도 큰 이득이 될 것이다. 시골 마을에서는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사는 것이 가장 유리하겠지만, 복잡한 도회에서는 끊임없는 분쟁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축적된 증거들은 인간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선천적인 성향과 학습 모두의 결과임을 보여준다. 절대적으로 큰 부분은 같은 문화집단의 다른 성원들을 관찰하거나 그들로부터 교육받아 형성된다. 그러나 자기 집단의 도덕규범을 수용하는 능력은 개인 간에 큰 차이가 있다."

"한 아이가 자기 문화의 윤리체계를 존중하며 성장하려면 그 문화의 규범들을 습득할 수 있는 선천적 윤리 성향과 일련의 윤리 규범들을 접할 수 있는 경험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약 300여년에 이르는 과학적 발견에 의해,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분자생물학의 폭발적인 성장에 의해 철학자들이 수천년 동안 고심했던 인간 도덕성의 생물학적 기초가 밝혀졌다. 이제 과학자들은 도덕성의 기원이 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저자는 서구의 전통적인 규범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서구의 전통적인 규범들이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경직성이 그 첫 번째 이유이다. 인간윤리의 가장 중심에는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하여 상반되는 요소들을 평가하고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윤리규범들이 우리 문화의 일부인 만큼 그들을 적용하는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 규범들이 너무 경직되어 있으 면 개인으로 하여금 따르지 않아야 할 선택을 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진화과정의 본질이 변이와 변화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윤리 규범도 적당히 유동적이어야만 상태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 …… 두 번째 이유는 인류가 진정 급격하고 급변하는 상태 변화를 경험해 왔다는 점이다. 3000년도 더 이전에 동아시아에 살던 유목민들이 채택한 윤리규범들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사는 현대사회에는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철학자들이 심오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제자리를 맴돌았던 이유는 '정신과 육체가 별개의 존재'라는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진리', '신', '절대자', 또는 '도'라는 이름으로 설정한 뒤 그것을 바탕으로 역시 알 수 없는 어떤 것을 추론했다. 과학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과학자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을 이야기할 때는 철학자들과 비슷해진다.
"나의 가치관은 헉슬리의 진화적 인본주 의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그것은 인류에 대한 믿음, 동료애, 그리고 헌신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보아줄 수 있겠다. 과학이 '가치'의 문제도 생물학적 기초부터 분석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건하게 가지고 있는 만큼 저자가 다시 이원론으로 되돌아 갈 일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에릭 캠벨의 '기억을 찾아서'에서 내린 결론과 거의 유사하면서 시간적으로 10년 정도 앞서기 때문에 그 책을 읽었다면 내용이 상당 부분 중복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결론을 위한 설명이 같진 않고, 서로 보완이 될 수 있는 내용들도 제법되기 때문에 강력 추천은 아니더라도 일독을 권장할 만하다. 어쩌면 이 책을 먼저 읽고 에릭 캠벨을 '기억을 찾어서'를 이어서 읽으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더욱 명료해 질 수도 있다.


Posted by think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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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아하자 2016.06.07 22:0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건 당연한데 당연하게 생각하기가 쉽지않죠. 흔히 주위에 병걸리는 사람만 봐도 육체적인 질병에 걸리면 정신도 피폐해지는 경우가 흔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