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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도덕적 동물 – 로버트 라이트

thinknew 2016. 6. 3. 20:48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함으로써 진화론을 생물계의 현상을 설명하는 확고한 기반으로 만든 이후, 허버트 스펜스가 주창한 것으로 알려진 사회진화론을 히틀러가 대단히 사악한 방식으로 오용하는 바람에 진화론은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자연선택(적자 생존이 아니라)에 이어 친족 선택 이론, 호혜적 이타주의 이론 등이 보강되면서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등으로 개별적으로 발전한 것처럼 보였던 이론들이 신다윈주의로 통합되는 추세에 있고, '도덕적 동물’은 신다윈주의에 입각하여 인간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훌륭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보인 책이다.

진화론은 크게 오용된 탓도 있지만 진화론의 결론이 인간이 오랫동안 사변적으로 추론해 온 생각들을 뒤집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사람들이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꺼려하고 있다.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인간이라는 종이 동물들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동물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인간의 특징으로 초기에는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추론했다가 점차 ‘이성’이라고 추론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성의 배후에는 본질이 존재한다고 믿었으며 그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론하는 역할을 철학이 담당하였고, 그 본질이 곧 신이라고 정의하고 신의 뜻을 살피는 역할을 신학이 담당했다. 그게 철학이 되었든 신학이 되었든, 관념의 세계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여 놓고,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든 악한 존재이든 간에 인간은 선을 이루고 구체화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해 갈 것이라는 게 ‘당위’의 개념이다.

사람들은 아주 오랫동안 이 ‘당위’의 개념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진화론이 존재의 변화는 ‘당위’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에 의해 구속되고, 진화는 방향성이 없이 일어난다라고 했을 때 그런 결론에 의해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과학적 발견들이 진화론을 점점 강화시키는 쪽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사람들의 반발은 많이 위축되긴 했으나 신학과 같은 특정 영역을 중심으로 반발은 여전하다.

어쨎든 이 책의 저자는 다윈의 삶을 진화론적으로 해석하고, 여러 과학적 발견들을 제시함으로써 신다윈주의적 추론의 타당함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진화론의 추론 결과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당위’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보였다.
"자연 선택은 인간 본성 속에 있는 파괴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자비스러운 것들도 만들어 냈다. 그러나 악의 뿌리들이 자연 선택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과, 인간 본성 속에서 (선한 많은 것들과 함께) 표현된다는 것은 확실히 참이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온갖 종류의 비밀스러운 배신이 있기 마련이고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 평판을 드날리려고 하기 마련이다. 평판은 이 '도덕적' 동물들이 게임을 하는 목적이다. 그러므로 위선은 타인의 죄를 들춰 내고자 하는 불만과 자신의 죄를 감추고자 하는 경향이라는 두가지 자연적인 힘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인간은 존경을 받기 위해서라면 군자처럼 행동할 수도 있고 짐승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인간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신다윈주의적 추론의 결과 도달한 결론이 결코 냉소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와 근연 관계에 있는 침팬지들이 자신들이 협의한 사항을 정의로운 분노로써 추구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이 이기적인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는지를 보았다. 침팬지들과 달리 우리는 이런 경향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자신들과 거리를 충분히 둘 수 있다. 본질적으로 그것을 공격할 수 있는 온전한 도덕 체계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멀리 말이다.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도덕적이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진실되고 반성된 삶을 살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이 있다. 우리에게는 자기 인식, 기억, 통찰력, 판단력이 있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 동안 진화론적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기술적’ 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도록 이끌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가 진실하고 긴장되는 도덕적인 정밀 조사를 받고, 우리의 행동을 적절하게 조정하는 것은 디자인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는 잠재적으로 도덕적 동물이지만(어떤 다른 동물이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자연적으로 도덕적 동물인 것은 아니다. 도덕적인 동물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철저하게 도덕적 동물이 아닌지를 깨달아야만 한다."
“자연주의의 오류라는 베일이 벗겨지고 사회적 다원주의의 지적 토대가 붕괴된 지 수십 년이 지나도 위와 같은 불안이 끈질지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상해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자연스러운'이라는 단어가 도덕의 문제에 관계하는 한 그 용법이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남자가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운다거나 약자를 착취해 놓고, 그것이 단지 '자연스러운’일이라고 변명한다고 해서 그가 그런 행동이 신이 정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말은 다만 그 충동이 너무 강해 사실상 억누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즉 자신의 행동이 옳지 않은 것일 수는 있지만 딱히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낙관적으로 결론을 맺으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저자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이 고도의 추론을 통해 도달한 결론을 대중들이 얼마만큼 수용할 수 있겠는가? 대중들에게는 ‘당위’를 전제로 한 추론 결과들이 여전히 더 매력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발견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아무리 많을 것들을 밝혀내었다 하더라도 다수의 인간들은 여전히 종교와 신비주의에 매달릴 것이다. 저자 자신도 위의 낙관적인 결론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신다윈주의)의 견지에서 우리는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스마일스가 바람직한 삶이란 “도덕적 의무, 이기심, 악”과의 전쟁이며, 그 적은 원래 끈질기다"고 말한 바가 얼마나 옳은 말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