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통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지키려고 한 그 전통이 지속적으로 변해왔음도 안다. 이런 변화를 진화론의 틀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문화 진화론'이다. 생물체의 진화는 다윈의 자연선택에 의해 충분히 설명된다. 생물종에 다양한 돌연변이가 생겨나고(변이), 그 중에 환경에 적응한 것만 살아 남고(선택), 살아남은 종은 유전을 통해 생존을 지속한다(유전). 문화도 변해가기 때문에 그 변화가 진화론으로 충분히 설명되려면 문화에도 변이, 선택, 유전의 세 요소가 있어야 한다. 문화의 변화에 그러한 요소가 있음을 보이려는 여러 시도 중의 하나가 수전 블랙모어의 '밈'이다.
저자는 도킨스가 생물체의 진화를 이끄는 복제자로 유전자를 지칭하면서 언급한 문화에서의 진화의 요소인 '밈'을 유전자와 별개의 제2의 복제자로 설정한다. 이 복제자는 유전자와 공진화하며, 때로는 유전자와는 별개로 진화하기도 한다는 것을 정교하게 보인다.
저자는 왜 문화진화론에서 제2의 복제자를 가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한 출발점을 '데카르트 이원론'으로 한다.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서 '데카르트 이원론'이라고 불리는 개념이 탄생했다. 사유하는 것은 물리적인 것, 공간을 점유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다. 우리 몸이 설사 일종의 기계라고 해도, '우리'는 그와는 다른 무언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뇌나 몸과는 분리된 무언가로 여긴다. 이것은 반드시 설명이 필요한 상황인데, 현재까지는 그다지 시원한 해석이 없었다."
"컴퓨터의 칩이나 회로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컴퓨터의 활동을 이해할 수 없듯이, 뉴런들의 행동이나 연결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인간의 의도, 동기, 감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의도가 전적으로 뉴런들에 의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컴퓨터의 연산이 전적으로 칩들에 의존하는 것처럼), 설명의 차원을 적당하게 잡아야만 그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아를 설명하는 적당한 차원은 무엇일까? 뉴런의 행동 차원은 아닌 것같다."
인간과 동물이 공통의 생물학적 바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가장 폭넓게 통합한 것은 사회생물학이다.
"사회생물학적 견해의 요지는, 유전자가 과거에 당시로서는 잘 작동하는 체계를 구축했으나, 그것이 오늘날의 상황에는 완벽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전자는 선견지명이 없으므로 환경 변화를 치밀하게 뒤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생물학 이전 수십 년 동안에는 인간이 어떤 면에서든 자연을 뛰어넘은 존재이고, 유전자와 생물학의 구속에 속박되지 않는 존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성적 행위에 관해서도 그랬다. 인간만이 '한낱' 생물학을 초월하여 누구와 어떻게 사랑을 나눌 것인가를 의식적으로, 합리적으로 선택한다고 했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이 중요한 핵심을 놓쳤다. 그들은 인간의 행동을 과거의 유전적 선택에 비추어 설명함으로써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다윈의 위대한 이론을 심리학에 적용한 셈이다. 하지만 그들은 유전자에만 집중했고, 사회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간과했다."
저자도 아직 의식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의식은 주의력이나 언어나 지능의 부수적 현상이고, 선택적 이득은 그 능력들에 존재하는 것이지 의식 자체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 더 극단적인 사람들은 의식이 망상일 뿐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생명의 메커니즘을 이해해가면서 결국 '생명력' 개념을 떨어뜨려 냈듯이,궁극에는 의식 개념도 버리게 되리라는 것이다. 아무튼 의식으로 큰 뇌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 수수께끼를 풀자고 다른 수수께끼를 끌어들일 수는 없다."
사변에 의존하는 철학이 오랫동안 한 일이 바로 '하나의 수수께끼를 풀고자 다른 수수께끼를 끌어들인' 것이다.
저자는 밈학을 주장하면서도 밈학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인간의 정신의 문제를 다룰 때 반드시 등장하기 마련인 종교의 문제도 같이 언급한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 거짓된 이론이 융성하곤 하며, 그 이유도 대부분 종교와 비슷하다. 무시무시한 생각보다는 안심되는 생각이 더 오래 버티고, 인간을 찬양하는 생각이 그렇지 않은 생각보다 더 인기를 누린다. 진화 이론은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관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반대를 겪었다. 밈학도 비슷한 일을 겪을지 모른다. 하지만 과학에는 어떤 생각이든 확인을 요구해야 한다는 원칙이 깔려 있다. 과학자들은 이론이 유효할 경우에 어떤 현상들이 벌어질지 예측한 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본다. 내가 밈 이론에 대해 하려는 일도 그런 것이다."
"종교는 그렇지 않다. 종교는 세상에 대한 이론을 구축한 뒤, 아무도 그것을 확인해 보지 못하게 막는다. 종교는 근사하고, 매력적이고, 위안이 되는 생각들을 제공한 뒤, '진실, 아름다움, 선함'의 가면을 씌워 그것을 은폐한다. 그러면 설령 진실되지 못하고, 추하고, 잔인한 이론이라 할지라도 번성을 누리게 된다."
"결국, 우리가 발굴해 내고 영원히 간직해야 할 궁극의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더 진실되고 덜 진실된 이론이 있고, 상대적으로 더 낫고 덜 나은 예측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최선의 과학은 종교보다 진실에 가깝다는 생각을 굳게 변호한다."
저자는 밈학을 통해 문화의 진화를 잘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함과 아울러,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은 '우리가 스스로 인식하는 자아는 없다'라는 것도 주장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중앙에서 모든 상황을 관찰하며 통제한다고 느끼지만, 그런 중앙 통제자가 머무르는 장소는 없다."
"우리는 주관성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아직 모르지만, 이것이 매 순간의 뇌 활동에 결정적으로 의존하는 현상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문화진화론을 주장한 것이 저자 뿐인 것은 아니며, '자아란 없다'라는 주장도 저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밈이라는 제2의 복제자를 가정함으로써 이런 주장들을 정교하게 엮어낸다. 우리의 본성과 문화라는 환경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는 이 책은 강력 추천 목록에 올려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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