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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우연과 필연 - 자크 모노

thinknew 2016. 9. 10. 17:47


인간의 본성 못지 않게 생명의 신비도 과학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던 분야였다. 그리고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철학과 신학이었다. 과학의 발전, 특히 생물학에서의 진전은 철학과 신학의 근거를 대부분 붕괴시켰다. 물론 인문학자들은 그 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학문이란 것도 결국은 헤게모니 다툼의 장이니만큼 진실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중의 무지에 의존하는 철학과 신학은 그 세력이 점점 약화되어 갈 것임은 분명하다.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시름했던 '우연', '필연' 이런 개념들을 이제는 과학자들이 풀어낸다. 그 과정에서 철학과 신학이 왜 길을 잘못들어 섰는지에 대한 이해도 증가한다. 자크 모노의 책 '우연과 필연'은 과학에 의해 철학이 극복되었음을 분명한 어조로 밝힌 초창기 저술에 속한다. 요약을 보자. 

저자는 분자생물학자이다. 말하자면 생물학의 하위 분과인 셈이다. 또한 저자는 생명의 신비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생물학의 역할을 강조하는 학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모든 학문 분과들 중에서 생물학은 '인간 본성'에 관한 문제를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기하려 할 때 그 이전에 먼저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의 핵심에 곧바로 접근하려고 시도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생명의 비밀' 이란 그 본질상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 비밀의 거의 대부분이 베일을 벗고 눈앞에 드러났다."

저자는 먼저 자연물과 인공물을 구분하는 것에 대한 사변적 추론으로 글을 시작한다. 물론 추론 만으로 끝났으면 이 책은 과학책이 아니라 과학철학 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분자생물학에서 규명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논의를 진행함으로써 생명의 신비에 대한 과학적 접근임을 분명하게 한다. 사변적 추론에 의해 도출해 낸 생명체의 속성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세 가지 속성을 찾았다. 바로 합목적성, 자율적 형태발생, 복제의 불변성이다."
합목적성은 생명체의 진화가 일어나는 방향에 대한 분석에 의해서, 자율적 형태 발생은 생명체의 자기 증식에 대한 분석에 의해서, 그리고 복제의 불변성은 유전의 안정성과 돌연변이의 존재에 대한 분석에 의해서 생명체의 속성임을 밝힌다. 이 과정에서 분자생물학적 지식이 많이 등장한다. 일반 독자들로서는 읽기가 쉽지 않을 수 있지만 그 부분을 건성으로 읽고 넘어간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므로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이해를 하고 넘어가도 좋겠다.

저자는 과학이 철학을 극복하였음을 주장하는 초창기 과학자들 중의 한명이다. 그래서 과학의 발전에 의해 폐기된 철학적 개념들에 대한 논증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이 자신의 책 제목에 (혹은 심지어 부제목 에라도) '철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설령 이 말 앞에 '자연'이라는 말을 붙여 '자연 철학'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 오늘날에는 분별없는 경거망동으로 보인다. 과학자들은 이런 책을 불신에 찬 눈초리로 볼 것이며, 철학자들은 그보다는 조금 나을 수 있겠지만 기껏해야 '짐짓 관대한 척' 가장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과학의 방법은 '자연의 객관성'이라는 공리 위에 근거를 두고 있다. 즉 현상을 설명하는 데 어떤 '목적인'이나 '의도'를 끌어들이는 모든 해석은 '참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 체계적으로 거부하는 게 과학이다. 이런 원리가 언제부터 발견된 것인지도 정확히 규정할 수 있다. 바로 갈릴레이와 데카르트가 관성(불활성)의 원리를 제정한 때로, 이 원리는 단순히 역학의 기초만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과 우주론을 배격함으로써, 현대 과학의 '지식의 논리'의 기초 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매 세대마다 마치 불사조인 양 다시 부활하는 이들 (유기체론적인 혹은 전체론적인) 학파들에 따르면 분석적인 태도는 '환원론자들'의 것으로서, 아주 복잡한 유기체의 속성들을 그 부분들이 가진 속성들의 '총합'으로 단순하고 소박하게 환원하기를 원하는, 언제까지나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할 불모의 주장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 '전체론자들'이 과학적 방법에 대해, 또한 이 과학적 방법에서 분석이 수행하는 본질적인 역할에 대해, 얼마나 철저하게 무지한지 만을 드러내는 아주 잘못되고 바보같은 논쟁일 뿐이다. 가령 지구에서 만들어진 계산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화성인 기술자가 있다면, 산술 연산을 수행하는 기본 전자 부품들을 뜯어보지 않고서도 그가 어떤 결론에인들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생명체가 모든 물리적 법칙들을 준수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의도를 추구하고 실현하기 위해서 이 법칙들을 초월한다는 것이 어떤 실질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인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분석적 기반 위에서이지 모호한 '체계에 대한 일반이론'과 같은 기반 위에서가 아니다."
"17세기 사람들에게나 현재의 우리에게나, 실제 사람들의 경험에서는 뇌와 정신이 서로 다른 것으로 체험되고 결코 서로 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분석해 보면 존재에 대한 이러한 이원론은 한갓 환상에 불과하다."


과학의 발전에 의해 극복된 것은 철학 뿐만이 아니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떤 사상이 크게 뻣어나간다는 것과 이 사상이 얼마나 많은 객관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가 하는 것 사이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 어떤 종교 이데올로기가 어떤 사회를 위한 강력한 방패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이 이데올로기의 구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구조가 사회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침투력을 가진 사상들이란 인간에게 우주의 거대한 내재적 운명 속에서 그의 자리를 배정해줌으로써 인간을 설명하는 사상, 그리하여 이 내재적 운명 속에서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켜주는 사상일 것이다."
"신화니 종교니 거대한 철학적 체계니 하는 것들을 발명하고 구축해야 했던 것은, 인간이 순전한 자동성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동물로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했던 대가였던 것이다."


저자는 과학을 부정하는 모든 세력들에 대한 비판으로 글을 마무리짓는다.
"과학이 주는 모든 힘으로 무장하고 또한 그것이 주는 모든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면서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바로 이 러한 과학에 의해 이미 그 뿌리까지 괴멸된 가치 체계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역자가 후기에 써놓은 한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쓰라림이란 세상의 진리를 이해해보겠다는 크고 당찬 포부로 철학을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긴 세월 동안 결국 '공자왈맹자왈' 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 같지 않은 짓을 자신도 모르게 해오고 있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 그리고 앞으로는 과연 이런 퇴행적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과 회의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번역에 뛰어든 철학 전공자가 자신이 번역한 책을 통해 자신의 그동안의 추구가 헛수고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자괴감을 저 한 구절로 분명하게 표현해 놓았다. 이 번역자는 솔직한 편이다. 번역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인문학자들이 저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호구지책과 관련되어 있어서 그런 행태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운이 나빴다. 저자의 책 제목도 '우연과 필연' 아닌가. 삶에는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운도 개입하는 법이다.

이 책은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가 그러하듯 이 책에서의 주장은 이 후 더 정교해지고, 더 많은 실증적 증거들을 반영한 책들이 나와 있으므로 독서 추천은 '일독을 권함'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