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a beautiful world!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를 기대하면서

독서

진화의 탄생 - 마이클 루스

thinknew 2017. 5. 12. 17:52


“1844년, 로버트 체임버스가 ‘창조의 자연사가 남긴 흔적들’을 펴냈을 때에는 전문 과학 공동체에 속한 거의 어느 누구도 그 책의 중심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을 펴냈을 때에는 생물 기원에 관심을 가졌던 과학자들이 재빨리 진화론으로 마음을 돌렸다.”
“1859년, 영국의 이름 높은 자연사학자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쓴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또는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에 관하여’가 나왔다.”

이 책은 저자가 위와 같이 언급한 것처럼, 그 시기 전후로 진화론이 정립되어 가는 과정에 영향을 미친 철학적, 종교적, 사회적 영향을 추적한 과학사이다.

다윈은 학문적 경력의 시작을 생물학에서 한 것이 아니라 지질학에서였다. 그리고 또 다윈은 진화론에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이 아니라 앞선 세대의 진화론적인 생각에 ‘자연선택’을 도입하여 진화론이 체계적인 과학으로 자리잡는데 큰 공을 세움으로써 진화론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다윈은 자기 이론을 '변형이 따르는 유래descent with modification'라는 말로 쓰는 편이었으며 책의 맨 마지막 낱말이 진화되었다evolved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진화evolution'라는 낱말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최초의 진화론자는 우리가 용불용설의 제창자로 알고 있는 라마르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가설들 즉, 용불용설과 획득 형질의 유전 가설은 이제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다윈의 이력을 간략하게 보면 다음과 같다.
"찰스 다윈(1809-1882)은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친가 쪽 할아버지 이래즈머즈 다윈은 유명한 내과 의사였고, 미들랜즈 지방에서 손꼽히는 과학자였으며, 산업가들과 친구이기도 했고 생물 진화를 사색한 유명한(아마 악명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산문과 운문을 지은 사람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도공인 조사이어 웨지우드Josiah Wedgwood로, 깜짝 놀랄 만큼 성공을 거둔 신기술을 잉글랜드 도자기 업계에 소개한 사람이었다. 다윈의 어머니는 다윈이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할아버지 세대의 영광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잉글랜드의 농업 중심지 슈롭셔의 슈루즈베리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의사였다.”
“1809년에 태어난 찰스 다윈은 처음에 에든버러 대학교를 다니다가 나중에 (1828년부터 1831년까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다녔고, 1831년부터 1836년까지는 자연사학자로 H.M.S. 비글호를 타고 전 세계를 주유하면서 보냈다. 영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금방- 아마 1837년 이른 봄이었을 것이다- 다윈은 진화론자가 되었고 1838년에는 생존경쟁에 의해 일어나는 자연선택 메커니즘을 생각해 냈다. 1842년에는 그 이론을 35쪽짜리 초안으로 작성했고, 1844 년에는 분량을 늘려 230쪽짜리 시론을 썼다”
“1844년, 로버트 체임버스가 ‘창조의 자연사가 남긴 흔적들’을 펴냈을 때에는 전문 과학 공동체에 속한 거의 어느 누구도 그 책의 중심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1859년, 다윈이 ‘종의 기원’을 펴냈을 때에는 생물 기원에 관심을 가졌던 과학자들이 재빨리 진화론으로 마음을 돌렸다.”
“1859년, 영국의 이름 높은 자연사학자 찰스 로버트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이 쓴 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또는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에 관하여’가 나왔다.”


다윈주의 진화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설은 자연선택인데 <종의 기원>에서 다윈이 직접 서술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유리한 변이는 보존하고 해로운 변이는 버리는 것을 일러 나는 자연선택이라 부른다(종의 기원, 1859. pp.80-81).”

다윈은 자연선택 개념을 정립하였으나 그 시대의 종교적 압력을 우려하여 발표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독자적으로 자연선택 개념을 채택한 글을 적어 다윈에게 보인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였다. 월리스의 <시론>을 받아 본 다윈은 그 내용을 공동 명의로 린네학회에 발표하고 난 후, 서둘러서 자기 생각의 '개요'를 썼다.
“이 개요, 곧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또는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종족의 보존에 관하여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of Life)>가 1859년 11월에 출간되었다.”

진화론이 점점 세력을 넓혀가고 있던 시절에 성공회 주교인 윌버포스와 ‘다윈의 불독’이라 불린 헉슬리 사이에 벌어진 재미있는 논쟁이 있다. 1860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열린 <종의 기원> 찬반 토론에서 “그 원숭이는 할아버지 쪽인가, 할머니 쪽 조상인가”라는 옥스퍼드 주교 새뮤얼 윌버포스의 말에 헉슬리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고 이야기한다.
"불쌍한 유인원을 할아버지로 두겠느냐, 아니면 천부적으로 높은 자질을 타고 났으며 대단한 수완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중대한 과학 논의에서 고작 이 재능과 영향력을 비웃음이나 던질 요량으로 쓰는 자를 할아버지로 둘 것이냐는 물음을 받는다면, 저는 주저없이 유인원 쪽이 더 낫겠다고 말하겠습니다."

진화론에 관한 논란에서 스펜스가 주창한 사회진화론을 뺄 수가 없다.
“진화, 나아가 선택의 요소들까지 각별히 저잣거리 사람들 마음에 들게 했던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진화론적 시각을 가지면 사회의 본성과 발달에 대한 다양하고 서로 자주 충돌하기도 하는 논제들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논제들은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을 수 있다.(Himmelfarb 1968, p535) 그래서 진화론을 반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가 발달한다는 뜻으로 읽어 내고 싶었던 일반적인 진보적 경향을 뒷받침해 주는 면을 진화에서 찾아냈기 때문이다. 또 같은 종에 속하는 것들끼리 벌이는 생존경쟁에 기초한 자연선택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극단적인 자유방임 경제를 정당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조금도 제재를 받지 않고 치열하게 벌이는 장삿일이 생물학적으로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다른 종들끼리 벌이는 생존 경쟁에 기초한 자연선택을 좋아한 사람도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민족들을 군사력을 써서 제국주의적으로 밀어내는 것 같은 국가 차원의 통제를 옹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마다 생물학적 학설을 가진 진화론자들, 생물학으로 뒷받침된다고들 생각한 다양한 학설들, 이 둘의 실제 관계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일부 생물학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저마다 좋아하는 갖가지 사회 학설들을 뒷받침하려고 생물학을 쓰려 했다는 것이다.”
“다윈은 틈날 때마다 사회다윈주의적인 시각을 똑똑히 부정했다("힘이 곧 정의"임을 다윈이 증명했다면서, 따라서 나폴레옹은 정의로웠고, 사기치는 장사꾼도 모두 정의롭다는 단언을 듣고 다윈은 분통을 터뜨렸다.(F. Darwin 1887. 2:262) ….. 그리고 삶이 끝나갈 즈음 다윈은 자연선택이 문명의 진보를 거든다고 적었다. ….. 따라서 생물다윈주의와 사회다윈주의 사이는 결코 뚜렷하게 갈라지지 않는다. 스펜서가 가진 시각, 그리고 그 시각을 써서 뒷받침한 모든 사회적 학설들 사이도 마찬가지로 명확히 가를 수 없다.”


또, 1970년대에 에드워드 윌슨이 되살리려고 했던 집단선택 가설에 대해서도 다윈은 분명하게 개체 선택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사람 아닌 것들의 세계를 말할 때에 다윈이 집단선택보다는 개체 선택을 단호하게 선호했음을 보았다. ……. 그럼에도 사람의 도덕 문제에 있어서 다윈은 일종의 집단 선택이 필요하리라 생각할 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생물학에서의 다윈의 위치를 물리학에서의 뉴턴의 위치와 동급으로 보고 있다.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16세기 폴란드 성직자였던 이 사람이 태양이 중심에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한 사람은 아니었다-그 영예는 기원전 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에게 돌아간다. 코페르니쿠스가 세세한 것까지 다 맞았던 것은 아니다. 그 일은 후계자인 티코 브라헤(하늘 지도를 정확하게 그렸다)와 요하네스 케플러(행성 공전 궤도가 타원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 (망원경을 사용했다)의 몫이었다. 마지막으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쓴 코페르니쿠스는 자기 이론의 바탕에 깔린 인과적 메커니즘을 내놓지 않았다. 그 일은 아이작 뉴턴과 중력법칙의 몫이었다. 이 전체 과정은 족히 100년은 넘게 걸렸다(Kuhn 1957). 그래도 우리가 코페르니쿠스의 공을 존중하는 것은 정당하다. 코페르니쿠스는 참으로 위대한 과학자였으며, 그 연구는 그가 했던 연구를 까마득히 넘어선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다윈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연선택을 발견한 덕분에, 코페르니쿠스에게 뉴턴 같은 사람이 바로 다윈이었다.”

여기서 다 요약할 수는 없었지만 이 책에는 <종의 기원>이 발표되던 시점 전후의 약 50여년 동안 진행되었던 철학적, 종교적 논의들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만큼 진화과학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 볼 필요가 충분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