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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정체성과 폭력 - 아르마티아 센

thinknew 2016. 9. 30. 14:05


무수히 많은 생물 종들 중에서 집단을 이루어 동종끼리 전쟁을 수행하는 종은 인간 뿐이라고 한다. 전쟁과 폭력은 역사 시대에 무수히 많이 일어난 사실이기도 하고, 선사 시대에도 그런 경향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들도 많다. 같은 종끼리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는 생존 경쟁과 성 선택을 위한 경쟁이다. 그런데 인간의 전쟁과 폭력은 이 이유만으로는 모두 설명할 수가 없다. 여기에는 유일하게 문화를 창조한 종 답게, 문화의 영향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생물학적으로는 동일한 종이지만 사회적 동물로 진화한 인간은 다양한 집단을 구성한다. 상대적으로 사회가 단순할 때는 그 집단을 정의하는 관념이 한, 두가지로 충분했지만 사회가 점점 더 거대해지고 복잡해 짐에 따라 집단을 하나의 관념으로 정의하기가 대단히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들은 또 서로 경쟁하기 때문에 집단의 결속을 위해 특정 관념을 지배적인 정체성으로 묶어두길 원하게 된다. 이런 경향이 집단의 경쟁이 격화되면 폭력으로 발전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이를 정교하게 논증한 것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책이다.


저자인 아르마티아 센(또는 아마티아 센)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학자이다. 평등 개념에도 관심이 많은 진보적인 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폭력의 문제를 정체성과 관련하여 정교하게 논증한다.

정체성이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타인과 구분되는 존재로서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대한 인식이다. 저자는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관념이 폭력의 원인이 됨을 이야기한다.
"적당히 선동되고 조장된 한 집단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다른 이들을 잔인하게 폭행하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실로, 세계의 무수한 갈등과 만행은 선택이 불가능한 독보적인 정체성이라는 환영을 통해 유지된다."
"단일 정체성의 환영은 그와 같은 대결을 획책하는 사람들의 폭력적 목적에 봉사하며, 박해와 학살의 명령자들에 의해 능란하게 양성되고 선동된다."


문제는 이런 정체성이 나쁜 것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체성이 폭력과 테러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풍부함과 따뜻함의 원천일 수도 있으므로 정체성을 단순히 일반적인 악처럼 다루는 것은 이치에 별로 맞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호전적인 정체성이 일으키는 폭력은 그 정체성과 '경쟁하는' 다른 정체성들이 만들어내는 힘으로 저지할 수 있다는 이해를 끌어들여야 한다."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폭력의 원인으로 기능하는 것을 예방하지 못하는 것은 사회적 현상을 분석하는 학계에서 다음과 같은 이중의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사회적, 경제적 분석을 시도한 학술 논문에는 두 가지 유형의 환원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정체성 무시identity disregard'라고 칭할 수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과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고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형식을 취한다."
"'정체성 무시'와 대조적으로, '단일의 소속 관계singular affiliation'라고 부를 수 있는 다른 종류의 환원주의가 있다. 이것은 누구나 모든 실제적 목적을 위해 더도 덜도 말고 오직 단 하나의 집단에 속해 있다고 가정하는 형식을 취한다."


저자는 인간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관념들에 대해 논증한다. 그리스 철학 또는 유교 철학 등과 같은 지적 전통, 종교적 정체성, 문화결정론과 문화상대론, 시장에서 발생하는 계층 구조, '서양-동양'이라는 정체성 등을 논증하면서 이런 관념들이 존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중 특정한 정체성을 유일한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결론을 겸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 정체성이 다원적 성격과 다양한 함의를 지닌다는 것을 인식함과 더불어, 불가피하게 다양한 정체성들의 타당성과 적절성을 판단하는 데 있어 '선택'의 역할을 파악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필요하다."

저자는 정체성이라는 관념과 폭력의 상관관계를 논증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진화론 또는 과학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다. 과학은 환원론를 바탕으로 하지만 환원론으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특히 사회 현상이 그렇다. 사회 현상도 생물학적 근원을 가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에 걸맞는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고 그것은 현 단계에서는 논증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서양의 학문 풍토에서 성장했지만 서양의 지적 전통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거의 전적으로 관찰된 결과를 중심으로 논증한다. 그리고 그 분석 결과는 보다 낮은 차원에서의 과학적 발견들과 배치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은 강력 추천 목록에 올려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