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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10가지 이론 - 레슬리 스티븐슨 & 데이비드 헤이버먼

thinknew 2016. 1. 11. 22:19


이 책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생각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라기에 관심을 가지고 손에 잡았지만 서문만을 읽고 그만 두었다. 그 이유는 서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사적 간주곡이라는 두 장을 추가함으로써 이 책의 무게 중심도 이전 판에 비해서는 좀 더 과거 쪽으로 쏠리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나쁠 것은 없으리라고 본다. 요즘에는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최신의 과학 연구나 인기 있는 이론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미래만을 내다보고 달려가다 보면 과거의 지혜를 잊어버림으로써 - 혹은 단순히 무시함으로써 - 편협한 현재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저자는 서구의 사상의 전통에 충실하다. 그래서 정신과 육체를 별개로 보는 이원론을 전제로 한 서구의 사상의 전통에서 출발점은 거의 항상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철학의 시조들이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이 정신과 육체가 별개의 것이라는 이원론을 확고하게 폐기시킨 오늘날,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 사고의 전개는 오류일 따름이다. 그런데 저자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생각들을 10개의 장으로 나눈 다음 고작 한개의 장에 과학에서의 진화론을 할당해 놓았다. 그 말은 물질을 다루는 과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단지 생각의 여러 갈래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동안 진화론에 대한 공격의 선두에는 거의 항상 종교가 있었다. 그러니 소위 말하는 인문학자들은 그 싸움을 불구경하듯 보면서 진화론에 입각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발견들을 '형이하학'이라고 치부할 뿐이다. 그러나 종교가 가지고 있는 딜레마를 인문학도 같이 가지고 있다. 진화론이 더 많은 것을 설명하면 할수록 그동안 사상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2천년 가까이 지탱되어온 것이 존립 근거를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으면서 자랐다. 나는 공학도여서 인문학에 대한 동경이 내내 있었다. 그래서 철학 사상에 관한 책을 적지 않게 섭렵했다. 또 종교에 귀의한 적도 있어서 특히 기독교에 관한 책도 제법 읽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많은 독서를 통해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항상 존재했으니 그것은 '진리란 무엇인가?'였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만 할 뿐 진리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 곳은 없었다. 단지 신의 권위를 빌리거나 그 시대의 사회적 권위자의 권위에 기대어 '진리란 이런 것이다.'라는 선언만 있을 뿐이었다. 이 책의 저자도 같은 과정을 밟고 있지만 어느 때의 누구는 이렇게 이야기했고, 또 이어지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고, 이런 식의 논의가 끝없이 이어질 뿐 한편으로 보면 그럴듯하나 다른 편에서 보면 모순인 상황은 변함이 없다. 이즈음에서 다시 한번 질문을 해 보자. '영원한 본질'이란 과연 무엇인가? '선'과 '악'은 무엇인가? '도'란 과연 무엇인가? '이성'이란 무엇인가? 수천년 동안의 사상사에서 무수히 많은 현인들이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하려 했으나 큰 틀에서 서양의 경우 그리스 철학, 동양의 경우 공자, 맹자의 선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란한 수사학만 발전했을 뿐 여전히 그 먼 옛날의 논의를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꽤 오랫동안 그 서구의 전통이라는 틀에서 벗아나질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서구의 사상적 전통에 기대지 않고, 과학적으로 규명된 사실만 가지고도 이원론을 폐기 처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도 논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란츠 부케티츠가 '자유의지 - 그 환상의 진화'에서 언급했듯이 '자유의지'라는 관념이 환상이긴 하지만 그 환상이 한동안 인간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문화 진화의 과정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았다고 했다. 철학 사상의 전통이라는 것도 이제와서 보면 비록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긴 하지만 의식을 가지고 있고 호기심이 강한 인류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었을 것이고 또 그래서 오랫동안 존재해 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 사상의 전통이라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이해가 깊어지고 있는 지금 그 전통을 여전히 따를 수는 없다.

또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좀 이상한 제목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안다. 불행하게도 교양을 쌍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으나, 교양인들은 교양이란 무엇보다 '오리엔테이션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들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양이 있다는 것은 어떤 책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신속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책을 다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 능력이 뛰어날수록 문제의 책을 읽을 필요성이 덜해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제대로 읽지 않고 대충 훓어본다고 해서 책에 대한 평을 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고전을 읽으면 읽지 않는 것 보다는 더 좋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고전을 많이 읽으면 말과 글이 풍성해지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고전을 꼭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과거의 지혜를 잊을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으나 그 우려가 방향 설정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이제는 과학과 인문학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있으므로 과학책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관한 타당한 설명을 하는 그런 책들을 더 많이 읽어야 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 사람들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가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철학사 읽듯 이 책을 한번 읽어볼 가치는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