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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 - 로즈, 르윈틴, 카민

thinknew 2017. 5. 2. 17:00




이 책의 저자들의 의도는 '생물학적 결정론'과 환원론을 비판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저자들의 비판의 촛점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주된 비판이 생물학적 결정론 비판에 할애되어 있는 만큼 곁다리로 끼어있는 환원론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환원론이란 어떤 복잡한 대상이 있을 때 그것을 부분으로 나눈 다음, 부분들에 대한 이해를 합하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방법론이다. 과학적 방법론이란 기본적으로 이 환원론에 바탕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유기체를 이해하기 위해 환원론적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가끔 비판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때문이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환원론적 방법론을 적용하더라도 그 수준이 단일한 것이 아니고 다수준으로 되어야 한다. 인간 집단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구성 요소인 개체로서의 인간을 이해해야 하고, 그 개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뇌 또는 더 아래로 내려가면 호르몬의 작용을 이해해야 하고, 그 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면 유전자를 이해해야 하고, 더 아래로 내려가면 화학 반응을 이해해야 하고, 결국은 물리법칙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극단적인 환원론, 즉 인간 집단의 이해하는 데에도 물리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고 하거나, 좀 더 올라가서 유전자만 이해하면 된다는 생각들이다. 이런 극단적인 환원론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들의 문제 의식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이 책의 주 목적인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이야기해 보자. 저자들은 환원론에 바탕한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의 사회현상은 개인들 행동의 직접적 귀결이고 개인의 행동은 타고난 육체적 특성의 직접적 귀결이라는 두 가지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생물학결정론은 인과관계의 화살이 유전자로부터 인간으로 그리고 인간으로부터 인간성으로 달려간다는 인간의 삶에 대한 환원론적 설명이다."

그리고 그런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저자들의 우려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생물학결정론의 관념들은 우리 사회의 불평동을 보존하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심상에 따라 인간의 본성을 형성하려는 기도 가운데 하나다. 그러한 관념들의 오류와 정치적 내용의 폭로는 그러한 불평둥을 제거하고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투쟁의 일부이다. 그 투쟁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생물학결정론은 직접적으로 이러한 불평둥을 변호하고, 그것을 자연스럽거나 혹은 공정하거나 또는 양자 모두에 속한다고 정당화한다."
"유전의 두 가지 의미-사회적인 것과 생물학적인 것-의 수렴은 세대에서 세대로의 사회 권력의 통로를 정당화한다."

이런 저자들의 문제 의식도 타당하다. 그런데 문제는 비판받아 마땅한 생물학적 결정론과 극단적 환원주의의 원흉으로 저자들은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과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로 들고 있다는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 즉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가설과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가설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심각하게 오용되어 온 역사가 있다. 저자들은 그 오용된 사례들을 다양하게 들고 있다. 20세기 초에 진행되었던 IQ 유전 문제, 우생학 문제, 정신병에 대한 처방 문제 등 다양한 사례를 든 다음, 그 사례의 핵심 멤버들이 윌슨의 사회생물학과 도킨스의 유전자론을 자신들의 사상적 근거로 삼았다며 윌슨과 도킨스를 생물학적 결정론자이자 극단적 환원론자로 규정하고 그들에게 비판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보자.
"정신분열증 연구에서 프란츠 칼만의 역할과 IQ 연구에서 시릴 버트의 역할 사이에는 많은 유사성이 존재한다. 두 사람 각각은 인간 행동의 유전적 결정을 정열적으로 믿었다."
이들은 유전자 결정론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사상적 배경은 사회생물학이고 그것은 생물학적 결정론이기 때문에 사회생물학은 나쁘다라는 식으로 논리가 전개된다. 물론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이들도 악을 구현하기 위해서 생물학적 결정론을 믿었던 것은 아니다.
"윌슨의 '사회생물학: 새로운 종합', 혹은 리처드 도킨즈의 책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생물학결정론 저술들에 의해 표현된 통합된 환원론적 세계관들은 명백히 유전자가 개인들보다 그리고 개인들이 사회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는 주장"
이렇게 '사회생물학'과 '이기적 유전자'를 생물학결정론과 극단적 환원주의의 바이블로 일방적으로 규정한다.


나도 위의 책들을 다 읽어 보았지만 그들을 생물학적 결정론자로 또는 극단적 환원론자로 규정할 근거가 없다. 오히려 이 책의 저자들이 우려하는 것들을 윌슨과 도킨스도 같이 우려하고 있어서 자세한 해설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도킨스는 자신의 책 '확장된 표현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세기 이전에는 개인의 일생 동안의 경험이나 기타 획득물은 유전 물질에 새겨져 아이에게 전달된다고 믿었다. 이 신념을 포기하고 생식질의 연속성이라는 바이스만Weisman의 교의에 의해 그 신념을 뒤바꾸어 놓은 것과 그것의 분자적 대안인 '중심 교조'는 현대 생물학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이다."
"단계적 환원주의자는 복잡한 전체를 설명할 때, 처음 단계에서 단지 한 단계 낮은 부품들의 입장에서 설명한다."
"환원주의란 사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해하고 싶은 솔직한 욕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윌슨도 '인간 본성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신은 매우 복잡한 구조이며, 인간의 다양한 사회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 정신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 영향 하에 있는 개인이나 인간이 어느 한 사람의 구체적인 역사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근원적인 의미에서 너와 나는 자유롭고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부차적이고 더 약한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행동이 부분적으로 결정되어 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행동 범주를 충분히 넓힌다면, 사건의 예측은 신뢰를 얻는다."


‘사회생물학’에서는 이런 언급도 했다.
"사실상 우리는 카스트의 차이가 유전적으로 고정되는 것을 막는 강력한 힘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아낼 수 있다. ....... 즉, 사회 내부에는 유전적 다양성이 크게 유지되고 있고 또 일부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특성들이 성공과는 매우 느슨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언급들을 통해 윌슨이 유전적 요인을 강조하기 했지만 결정론이라고 까지 할 수는 없다.

저자들은 생물학적 결정론의 대척점에 있는 문화결정론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한다. 인간의 본성이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되다는 것이 유전자 결정론(생물학적 결정론)이라면 유전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오직 환경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것이 문화결정론이다. 둘 다 비판 받아야 마땅한 것이고 그것을 비판하고자 하는 저자들의 문제 의식 또한 타당하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생물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통합을 요구한다고 추장해야 한다."

생물학 결정론과 문화결정론을 공히 넘어서야 한다는 말인데, 저자들의 선언이 틀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저자들이 생물학 결정론이라고 비난하는 도킨스와 윌슨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킨스는 '확장된 표현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전적 원인과 환경적 원인은 원칙적으로 서로 차이가 없다. 어떤 원인에서 오는 것이든 그 영향에는 바꾸기 힘든 것도 있고 쉽게 바꿀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영향은 보통 바꾸기 힘들다 해도 적정한 작용인자를 부여받으면 쉽게 바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유전적 영향이 환경적 영향보다 더 비가역적이라고 기대할 통상적인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윌슨도 '인간 본성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사회적 진화는 유전의 쌍궤도, 즉 문화적 궤도와 생물학적 궤도를 따라 나아간다. 문화적 진화는 라마르크적이고 매우 빠른 반면, 생물학적 진화는 다윈적이고 대체로 매우 느리다."

저자들은 윌슨, 도킨스 같은 사람들은 생물학적 결정론자들로서 '나쁜 과학'을 하는 사람, 자신들은 '좋은 과학'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구도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선언적으로 이야기한다.
"결국 지식의 두 형태의 통합만이-환원론이 부정하는 것은 필요하고 결정론이 부정하는 것은 가능한 그런 통합과 같은-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생물학결정론이든 문화결정론이든 혹은 몇몇 종류의 이원론적 불가지론이든 그러한 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업에는 적당치가 않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물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더욱 변증법적인 이해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생물학적 결정론이든 문화결정론이든 그것은 가설로서 등장했다가 신다윈주의 진화론에 의해 반박되어 거의 폐기되어 가고 있는데, 저자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가설이 없다. 그런데 '사회생물학'과 '이기적 유전자' 가설은 생물학적 결정론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한다.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이 저자들이 윌슨이나 도킨스의 주장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들의 다음과 같은 언급들을 보면 그런 것 같지 않다.
"’사회생물학’에서 윌슨은 통속 행동학을 "옹호에 대한 연구들"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하려고 추구했지만,"
"도킨즈가 그의 가장 최근의 책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에서, 환경을 파악하려 노력한 것은 흥미롭다."


과학자들이라고 명성에 대한 욕심이 없을까 만은 이 책의 저자들은 사회생물학을 내건 사람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윌슨, 도킨즈, 트라이버스(Trivers)가 사회생물학에 대해 쓴 것은 그들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높이려는 그들의 이해를 반영한다. 우리가 쓰는 것은 우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저자들이 비판의 표적으로 삼고 있는 윌슨, 도킨스 같은 과학자들은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저자들과 추구하는 바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생물학적 결정론과 극단적 환원론은 비판받아 마땅할 뿐더러 그 점에 대해서도 윌슨과 도킨스는 기꺼이 동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생물학'과 '이기적 유전자' 가설을 억지로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단정하고 자신들이 통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무지하거나 아니면 통합의 주도권을 자신들이 쥐어야 한다는 야심의 발로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내 생각에는 후자의 요인이 더 큰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저자들의 결론을 감상해 보자.
"생물학결정론자에 대해 이야기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이 내적 원인들, 특수한 행동을 지배하는 또는 이들 행동의 경향을 지배하는 유전자들의 비교적 적은 숫자에 의해 강력하게 구속되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생물학과 다른 유기체에 관한 생물학 사이의 차이의 정수를 놓치고 있다. 우리의 뇌, 손, 혀는 외적 세계의 많은 단일한 주요 면모들과 우리를 독립되게 한다. 우리의 생물학적 상태는 우리를 우리의 정신적 환경과 물질적 환경을 계속적으로 재창조하는 생명체가 되게 해왔고, 우리의 개인적 삶은 교차되어 있는 인과적 경로들의 특별한 다중성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생물학적 상태이다."
이 결론이 이해가 안된다면 그 이유는 두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저자들이 횡설수설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설명이 부족해서 일 수가 있다. 나는 전자라고 생각하지만 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내가 이해를 잘못해서 일 수도 있으므로 이 내용을 이해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을 공유했으면 좋겠다.

이 책은 도킨스가 ‘눈 먼 시계공’에서 다윈의 입을 빌어 한 다음과 같은 말, "다윈이 지적했듯이, '개인적인 불신에서 비롯된 주장'은 극히 빈약한 주장이다."의 전형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주장이 고약한 것은 '문제 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