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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제임스 길리건 II

thinknew 2016. 7. 9. 16:28

지난 글에 이어서 이번에는 보수, 진보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 요인 중 '수치심의 문화'와 '죄의식의 문화'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을 해 보았다.

"예전에 쓴 글에서 나는 결핵균이 결핵 발병의 필요 조건이지만 충분 조건은 아니듯이 폭력 행위를 낳는 으뜸가는 원인을 수치심으로 지목하면서 수치심은 폭력 행위를 낳는 데 충분하지는 않아도 꼭 필요한 병원체라고 말했다."
"수치심의 심장부에는 역설이 있다. 우리는 보통 수치심을 감정으로, 그것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여기지만 수치심은 실은 자기애(라고 해도 좋고 자부심, 자존심, 자존감 또는 자기가 쓸모있다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은데)라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수치심의 위력을 간과하는 것은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경험이 객관적으로는 그야말로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이유에서 비롯된다는 사정이 있어서다. 위대한 심리학자는 소설가일 때가 많은데,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는 남북전쟁이 터지기 전의 남부를 배경으로 한 비극적 소설 <압살롬 압살롬>에서 주인공이 무일푼이던 청년 시절 돈 많은 백인 대농장주 밑에서 집사로 일하던 흑인 노예로부터 저택의 정문 말고 뒷문으로 들어오라는 위압적이고 거만한 지시를 받고 느낀 수치심을 치유하느라고 발버둥치던 끝에 결국 어떻게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는지를 그린다."
"사람들은 수치심 때문에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울 때 자기 안에 있는 수치심을 남한테 떠넘겨서 수치심에서 벗어나려고 (혹은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수치심을 아예 처음부터 피하려고) 살인을 저지르거나 남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자살의 전모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죄의식이라는 또 다른 감정도 고려해야 한다. 죄의식은 자신을 꾸짖는 감정이다 죄의식을 낳는 원인은 수치심을 낳는 원인과는 정반대에 가깝고 죄의식이 불러 일으키는 행동 역시 수치심에서 나오는 행동과는 정반대에 가깝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죄의식은 수치심의 반대편에 있지만 그렇다 해도 죄의식과 수치심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얽혀있다는 사실, 이것이 죄의식과 수치심의 역설이다. 수치심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유발하며 이런 행동은 어떤 예외적인 상황에 서는 살인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죄의식의 심리적 기능은 수치심이 자극하는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저지하는 것(곧 막는 것)이다. 그런데 수치심이 자극하는 타인에 대한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충동은 때로 자기 자신에게라도 터뜨려야 겨우 타인에게 화살이 향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그래서 자신의 수치심을 남들에게 폭력을 휘둘러서 말끔히 없앨 수 있다고 믿느냐, 아니면 자기 목숨을 끊어야만 이런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감정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믿느냐에 따라서 수치심은 자살을 낳기도 하고 살인을 낳기도 한다."
"수치심의 윤리는 수치와 굴욕이, 다시 말해서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 곧 자부심과 명예(존경)가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 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 두 가치 체계는 상극이다. 가령 기독교라는 죄의식의 윤리에서는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악 중에서 가장 몹쓸 죄악이 바로 수치심의 윤리에서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자부심(교만)이다. 따라서 죄의식의 윤리는 아무도 남에게 우월감을 못 느끼도록 (그래서 아무도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는 데서 오는 수치와 굴욕을 맛보지 않도록) 평등주의를 옹호하고, 반면 수치심의 윤리는 우월한 사람이 있으며 그런 사람은 자부심과 명예(존경 받음)을 만끽하고 열등한 사람은 열등감과 수치심을 느끼는 위계화된 사회 체제를 미화한다."


저자는 이런 수치심과 죄의식이 어떻게 정치적인 보수와 진보의 관념으로 연결되는지를 이야기한다.
"수치심과 죄의식은 도덕의 감정이고 따라서 정치의 감정이기도 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이 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상반된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가치 체계의 감정인데, 이것을 정치적 용어로 표현하면 '우파' 이념과 '좌파' 이념이 된다. 도덕적 분쟁을, 즉 정치적 분쟁을 이해하려면 도덕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있고 정치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있음을 꼭 알아야 한다. 도덕은 마치 단 하나의 도덕 체계만이 있을 뿐이고 사람은 그것을 지켜야지 안 그러면 비도덕적인 것처럼 몰아가지만 사실은 도덕 담론과 정치 담론이 처음 생겨날 무렵부터 도덕철학자들은 두 가지 상반된 도덕이 있음을 잘 알았다. 적어도 서구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구약의 이스라엘 시절부터 그랬다."
"수치심에 휘둘리는 정치적 가치 체계는 명예와 수치의 위계 구조에서 우월한 지위를 놓고 다투는 데 주안점을 두는 정당을 낳을 것이고 그런 정당이 사회를 자꾸만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수치 문화로, 즉 폭력이 일어나기에 안성맞춤인 세상으로 몰아가리라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평등주의적인 정치 이념은 지위의 차이를 줄여서 사람을 수치로 부터 지켜준다. 지위의 높낮이를 가르는 기준 자체가 없으므로 그런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높은 자리도 없고 낮은 자리도 없다. 사람들이 수치와 불명예를 느낄 위협에 노출되지 않고 하루아침에 신분이나 지위 가 뚝 떨어지는 추락을 겪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는 폭력의 수위가 낮아진다. 20세기 미국에서 두 정당이 집권하는 동안 나타난 폭력의 역사는 이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보인다."
"총기 소유는 민주당 집단보다 공화당 집단에서, 특히 기업가 집단과 사회적 보수주의자 집단에서 훨씬 일반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권위주의적 인격은 가치관과 태도에서 평등주의적 인격과 여러모로 차이가 있다. 가령 권위주의적 인격은 사회적 불평등, 위계 질서, 신분 차이를 용인하고 경찰, 군인, 재판관, 교도관처럼 공권력을 지닌 존재가 휘두르는 폭력을 수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권위주의적 인격은 사람을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로 나누어야 한다고 믿을 뿐 아니라 자기가 속한 인구 집단이 더 우월하다고도 믿는다."
"권위주의 연구는 방법론에서 점점 정교해졌는데 그러면서 더 분명해진 한 가지 사실은 권위주의가 우파의 정치적 태도 및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파 권위주의라는 말은 사실 동어반복이다.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Norberta Babbia)가 <제3의 길은 가능한가: 좌파냐 우파냐>에서 지적한 대로 우파 정치 운동은 사회적 불평등과 신분 질서를 긍정적으로 보며 좌파 정치 이념은 사회, 경제적 평등을 추구하는 데 무게 중심을 둔다. 그래서 우파 정치는 권위주의적 인격의 가치관에 딱 들어맞는다."
"사실 선거 운동의 틀을 두 후보의 순전히 개인적인 대결로 몰아가려는 목적 중 하나는 두 당의 실제 정책 차이가 무엇인지에 유권자가 주목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데 있다."


저자는 수치심이라는 정서의 부정적인 면을 자세하게 설명했지만 거의 모든 심리학적 요인들이 그러하듯 수치심도 오직 부정적인 요소 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해 두었다.
"여태까지 나는 수치심이 가져올 수 있는 병폐라든가 부적절한 영향을 강조했지만, 수치심은 적절한 기능을 할 수도 있음을 밝혀 두고 싶다. 수치심은 우리가 열등감을 이겨내고, 실수를 바로잡고, 성숙해지고, 발전하고, 배우고, 우리가 자부심을 가질 수 있고 남들로 부터 존경심을 끌어낼 수 있는 일을 성취하도록 자극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일은 사람들이 교육이라든가 건설적이고 의미있는 일을 통해서 수치심을 털어버리고 긍정적인 자존감을 얻을 수 있는 비폭력적 수단에 접근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변하지 않으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변하려면 우리가 지난 사고, 감정, 행동의 낡은 방식은 한계가 있음을, 부적절하거나 잘못되었거나 열등함을 인정하고, 이런 낡은 것 들을 버리는 대신 우리가 온전하고 좀 더 알찬 삶을 꾸려 갈 수 있게 해주고 우리가 의지하고 또 의지가 되어주는 다른 사람들도 온전하고 좀 더 알찬 삶을 꾸려갈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사고, 감정, 행동의 방식으로 바꾸어야 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한 한 가지 전제 조건은 수치심을 느끼더라도 수치심을 줄이는 수단으로 폭력에 기대지 말고 수치심을 견디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수치심은 야심과 성취의 발판이 되고 지식과 실력을 키우는 자극원이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폭력을 유발하는 잘못 중 하나는 개인들과 집단들을 다 좋은 쪽이나 다 나쁜 쪽으로 나누는 버릇이다. 그러나 내 관심은 폭력에 있으며 거기에는 좋든 싫든 명확하고 절대적인 이분법이 존재한다. 바로 바로 삶과 죽음의 차이다."


의학자로서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 의학의 진보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겠지만 사회적 여건의 개선은 이러한 결과를 더 신속하게 더 성공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 (바로 그래서) 의사는 본디 가난한 사람의 변호인이고 사회 문제는 넓게 보면 의사의 영역에 들어간다. 인간을 다루는 과학으로서 의학은 사회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의학통계학은 우리의 측정 기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무게를 생명으로 달고 어디에 시신이 더 두텁게 쌓였는지를 볼 것이다. ...... 의학은 사회과학이고 정치는 규모를 키운 의학일 뿐이다."

보수의 껍데기를 둘러쓰고는, 미국의 공화당보다 더 한 병폐를 드러내는, 무늬만 보수당인 정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에서라면 당연히 이 책이 필독서가 되어야 한다. 강력 추천 목록에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