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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회

공정함에 대하여

thinknew 2016. 2. 1. 20:09
TV 프로그램 중에 1대 100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일단 형식은 유명인 1인이 100인과 퀴즈 대결을 벌인다는 구성인데 이게 심히 불공정한 게임이다. 왜냐하면 1인대 100인의 대결인 것 같지만 사실은 101명이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유명인 1인은 찬스도 두차례나 사용할 수 있고 최후의 1인이 되면 5천만원을 받는데 비해 100인은 초청받은 1인이 떨어질 때까지 모아둔 금액(작게는 10만원부터 많아야 몇백만원 정도)만 받아갈 뿐이다. 그런데 이 프로가 사람들에게 꽤 인기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런 불공정함을 개의치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내 주변의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보았더니 인기 스타하고 같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 만으로도 그런 불공정은 상쇄가 된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이 프로그램이 불공정하긴 하지만 그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의 기대가 공정함에 있지 않으니 별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스포츠 게임을 볼때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편파적이 된다. 자신이 선호하는 팀이 문제를 일으키면 그건 그럴 수 있는 것이고 상대팀이 문제를 일으키면 그건 곧 죽을 죄에 해당된다는 듯이 분노를 표출한다.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우리가 편파적이어도 별 문제가 없는 것은 경기 그 자체는 공정하게 진행된다는 묵시적 동의가 성립되어 있고 또 그 승패가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앞의 두 예에서 보듯 공정함이라는 것이 중요한 가치이긴 하지만 사회의 모든 요소에서 공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정치에 대해서는 어떨까? 우리는 정치에 대해서도 편파적이어도 문제가 없을까?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공정함으로서의 정의'에 대해 길게 설명해 두었다. 즉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하면 공정함이 사회의 바탕에 깔려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정치인들은 그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할 책무가 있고 유권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선택하여 투표권을 행사한다. 여기에 불공정함이 개입하게 되면 그것은 곧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을 선택하는 것에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정치인을 선택함에 있어 아군 적군을 따진다.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자들의 행태가 그러하다. 물론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신이 아닌 이상 일정 정도 편파적이긴 하다. 그러나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유독 그 정도가 심각하다. 그리고 그런 편파성을 앞장 서서 부추기는 집단들이 있으니 바로 조중동이라고 지칭하는 수구 신문들, 종편이라 불리는 방송들이다. 이들의 편파성은 보기에도 심히 거슬릴 뿐 아니라 실제로 사회적으로 암적인 존재라고 해야 마땅하다.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의 심판이라도 받지만 언론은 그런 것도 없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이라는 종이 공정함에 대한 감각을 천부적으로 타고 난다고 한다. 사변적 추론에 의한 당위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행동에 대한 정교한 실험을 거친 후에 내린 결론이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심리학 실험이 있다. 최후통첩 게임이 바로 그것이다. 실험 대상자들을 두 집단 A, B로 나눈 다음 집단 A에는 20달러 정도의 돈을 주고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권한을 준다. 집단 B는 집단 A가 제시하는 나눔에 동의를 하든가 거부하든가 할 수 있다. 단 집단 B가 동의하면 그 나눔이 성립하지만 동의하지 않으면 둘 다 돈을 가질 수 없다. 말하자면 집단 A는 집단 B에 대해 전혀 안준다고 할 수도 있고 모두 다 준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전혀 주지 않는다고 하면 집단 B가 동의하지 않을 것임은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집단 A가 집단 B에게 모두 준다고 할 리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를 보는 것이 이 게임의 진행 방식이다. 고전 경제학에서의 전제가 되는 '합리적 개인'이 타당하다면 집단 A는 1달러를 준다고 할 것이고, 집단 B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1달러가 아무리 적다 하더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혐 결과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집단 A가 지나치게 적은 금액을 제시하면 집단 B로서는 그래도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이익임에도 불구하고 거부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략 절반 가까이 되는 금액에서 타협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물론 문화권 마다 그 비율을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공정함에 대한 감각이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우리라고 그런 공정함에 대한 감각을 타고 나지 않았을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에 그런 공정함을 적용하지 않고 편파성을 드러내는지가 대한민국의 딜레마이다.

거기에 덧붙여 우리는 과연 북한에 대해서는 공정하게 다루지 않아도 될까를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북한의 존재 자체가 우리의 정치, 사회 환경에 영향을 강하게 미치기 때문이다. 북한은 남한을 침공한 전력이 있는 나쁜 놈들이어서 마치 우리가 스포츠 게임을 보면서 편파적으로 굴듯 북한에 대해서도 편파적으로 대해도 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몇몇 인간들은 자신들은 북한에 대해 편파적인 것이 아니라 북한의 악행에 대해 응징하는 것이라고 목청을 높일 것이다. 어쩌겠나. 그런 인간들도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것을. 다만 그 숫자가 작기를 바라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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