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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 노엄 촘스키 I

thinknew 2016. 11. 6. 16:31


심리학에서는 사람들은 한번 가진 생각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놓았다. 그것은 고정관념 때문일 수도 있고, 인지부조화의 영향일 수도 있고, 사고의 관성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대한민국의 몇몇 사람들에게 뿌리깊게 박힌, 거의 무의식 수준에 도달했다고도 할 수 있는 관념 중의 하나가 '미국은 우리를 공산주의로 부터 지켜주었다'라는 것이다. 그 생각이 얼마나 강한지 국가의 자존심조차도 미국과의 관계를 위해서라면 접어둘 수 있다고 까지 주장할 정도이다.

미국의 진짜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판이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 블로그에 요약을 올린 '오만한 제국'의 저자 하워드 진도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미국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노엄 촘스키도 힘을 보태었다. 진은 20세기 미국의 행태에 촛점을 맞춘 반면 촘스키는 아예 그 범위를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까지 넓혔다. 여전히 미국이 국내 정치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미국의 본 모습을 이해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일일 것이다.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긴 하지만, 블로그를 방문하는 독자들에게 알려 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많아 이 포스트도 I, II로 나눈다. 포스트 I은 신대륙 발견 이후의 유럽인들이 행한 짓, 그리고 미국이 건국되고 나서 미국이 대외적으로 행한 짓들을 단순히 나열한 것이다.

제목에 '507'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가 1492년이어서 그 500년 후인 1992년 미국에서는 대대적인 기념 행사들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그 분위기를 제3자의 눈으로 관찰하는 저자가 신대륙 발견 이후의 역사의 허구성을 밝힌다는 점, 그리고 그것의 극복을 위한 첫걸음을 의미하는 '501'이라는 숫자를 썻는데, 번역자가 번역한 시점이 책이 출판되고 7년이 지난 때여서 번역판의 제목에 '507'이라는 숫자가 붙은 것이다. 아무튼 신대륙 발견 이 후의 흑역사부터 먼저 보자.

"(이라크의 독재자였던 사담) 후세인은 1990년 8월 2일 최초로 심각한 '범죄'[쿠웨이트 침공]를 저질렀다. 범죄란 바로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이었다."

"미국의 경제적 헤게모니가 후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닉슨 대통령은 대단히 직설적인 반옹을 보였다. "우리가 손해를 보고 있으면 게임의 규칙을 바꿔야 한다." 닉슨은 국제 통화 체제의 관례를 무시하고 금에 대한 달러의 교환을 일시 중지시키는 한편 일시적 임금 통제, 수입품에 대한 추가 관세 징수, 부자들에게 유리한 세제 도입 등의 조치를 취했다. 기업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은 그대로 둔 반면 연방과 주 예산에서 복지 예산은 삭감됐다. 닉슨의 이 같은 정책은 이후 미국 경제 정책의 기본적인 방향으로자리잡게 된다. 특히 레이건 대통령은 닉슨보다 한 술 더 떴다. 그 결과 연방, 주, 지방, 기업, 각 가정 등 미국 사회의 거의 모든 경제단위에서 빚이 쌓인 반면 생산적인 투자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이 같은 경제 정책이 초래한 가장 큰 피해는 국민과 미래의 세대에게 엄청난 빚을 남겼다는 점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미국과 영국은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고 방해를 일삼으면서 UN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방해와 제3세계 반미주의 때문에 UN이 무기력해졌다며 책임을 전가해 왔다."

"1950년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민족주의적 독립 열망을 억누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당시 워싱턴은 동맹국인 프랑스를 돕기 위해 정보기관들에게 호치민이 모스크바 또는 북경의 꼭두각시라는 확실한중거를 찾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베트남에서 '크렘린의 음모'를 발견하는 데는 실패했다. 중국과의 연관성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자 모스크바가 베트남을 완전히 신뢰한 나머지 완벽하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라고 결론을 모으게 됐다. "모스크바와 베트남 간에 접촉 증거가 없다는 점이야말로 극악무도한 '악의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야욕을 입중하는 증거"란 것이다. 이처럼 미국이 사실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 예는 한둘이 아니다."

"2차 대전 동안 소련과 미국은 나치를 물리치기 위해 손을 잡았다. 그러나 이 동지적 관계는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아들과의 대화에서 소련이 나치와의 싸움에서 지쳐 떨어질 때까지 미국은 기다리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참전을 선언함으로써 소련을 제거하는 것이 자신의 전시 전략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1980년대 중반 고르바초프가 냉전 체제의 대립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일방적인 군 병력 감축, 핵무기 실험 중지, 군사 동맹의 폐기, 지중해 주둔 해군 함대 철수 등 일련의 파격적언 조치들을 취했을 때도 미국은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미국으로서 긴장 완화란 제3세계 봉사 지역을 상실하게 될 뿐 하등 가치 없는 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국면은 소련의 군사비 지출에 대한 '환상'을 동반했다. 정확성 따위는 아예 필요 없었다. 1982년 펜타곤 자료에 따르면 "NATO(외국으로 부터 침략 받을 위험이 전혀 없었던 미국을 포함해)는 1971-1980년 동안 바르샤바 조약기구(당시 소련은 중국과의 국경에 대규모 군 병력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에 비해 2천5백억 달러나 더 지출했다." 그러나 경제학자프랭클린 홀즈먼의 분석대로 이런 수치조차 정확하지 않았으며, 특히 소련 군 병력을 과대 평가한 부분이 많았다. 실제로1970년대 동안 NATO와 바르샤바 간의 격차는 7천억 달러에 이르렸다. 카터 행정부와 레이건 행정부를 거치면서 추진됐던 미군 병력 및 NATO 군 확충 압력은 "소련이 군비를 꾸준히 증가시키고 있다는 잘못된 주장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고 레이몬드 가소프는 지적했다. 1970-I960년대 동안 미국 전략 핵무기와 탄두 숫자에 있어서도 NATO는 소련을 훨씬 앞질렀다. 홀즈먼은 1970년대 말 강력한 정치적 압력 아래 CIA가 사실을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월슨 대통령은 한쪽에서는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을 침략하면서, 또 다른 쪽에서는 민족 자결과 약소 국가를 지지하는 이상주의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윌슨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둘 사이에는 애당초 모순이란 전혀 없었다. 즉 인권이란 "낮은 수준의 문명"인에게는 적용될 필요가 없으며 문명화된 국가의 "친절한 보호, 지도,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요약하기가 쉽지 않아 인용하지 않았을 뿐, 아메리카 인디언들에 대해서, 중남미 국가들에서, 중동 지방에서 그리고 아시아에서 행한 학살과 약탈의 역사 등이 450여 쪽에 이르는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행위들의 의미에 대한 분석의 요약은 다음 포스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