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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과학을 배반하는 과학 - 에른스트 페터 피셔

thinknew 2016. 5. 17. 20:50
근대 과학이 성립한 이래로 사람들이 과학을 대하는 태도는 이중성을 띠고 있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키로 인식된 적도 있었고,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위험한 도구로 인식된 적도 있다. 이런 이중성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한편,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정신의 문제는 몰라도 아는 것처럼 위장해야만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상대적으로 물질의 영역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과학은 몰라도 그 사실에 대해 거리낌이 없이 '과학은 너무 어렵다'라는 불만을 태연히 드러낸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을 보다 쉽게 대중들에게 전달하겠다는 의도를 지닌 전문가들이 있다. 그런 전문가들의 존재는 소중하다. 그러나 자신이 그런 역할을 담당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그런 역할에 충실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음 책의 저자가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과학자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과학사를 유려한 필치로 서술한 저서도 몇 권 있다. 그래서 저자는 과학에도 오류가 있다는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당연하다. 과학사를 보면 과학의 발전은 이론과 반증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문제는 저자가 '과학에 오류가 있다'는 타당한 문제 제기에서 출발하여 사변적인 철학적 논의로 되돌아 가자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사변적 논의로 이루어진 서구 철학적 전통을 먼저 비판한다.
"철학자 이사야 벌린IsaiahBeriln 지적한 오류에 이르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오류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옳고 객관적으로 타당한 해답을 얻을 있다는 견해이다. 견해는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근본적이어서, 안타깝게도 서양에는 근본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은 철학자가 없다."
여기서 '그 오류'란 과학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논의의 전개가 이상해진다. 과학의 오류를 사변적 철학의 오류와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그 말은 저자는 과학을 서양 철학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다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보면 저자가 서구의 철학 사상적 전통에서 벋어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역사는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것이라는 깨달음은 인류가 19세기에 이룬 위대한 발견이다."
역사라는 것이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만드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현재의 사회과학의 방법론으로는 규명할 수 없는 문제여서 사변적 논의에 불과하다. 그런데 과학을 논하는 자리에서 저런 사변적 명제를 꺼내든다.

저자 자신도 사변적 논의를 부정한다.
"우주에 생명이 거주할 있는 장소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논의는 사변을 퇴출시킨채 진행될 것이다."
이렇게 서술한 다음 곧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자기 주장을 끼워넣는다.
"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그렇다'라면, 그보다 흥분되는 일이 있겠는가! 하지만 정반대로 '아니다'라면? 대답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
외계에 생명이 존재하는지 않는지는 아직도 검증되지 않은 문제이다. 그래서 외계 생명의 존재를 믿든 아니든 과학자들은 이 점에 대해 단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자는 외계 생명이 존재할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저자는 종교에 대해서도 유사한 태도를 취한다.
"'가망없는 관념', 미국 철학자 데니얼 데닛이 <주문을 깨뜨리기>에서 신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다. …… 신이 가망 없는 관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뉴런들의 집단을 통해 이해하려는 생각이 그러하다."
과학자들은 종교도 과학적으로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검증에 대해 종교는 극렬하게 저항한다. 진화론이 여러 과학적 발견에 의해 정교해지면 질수록 종교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은 서로 싸우는 상대가 아니라, 인간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벌이는 활동으로서 서로 의지해야 한다. 자연과학- 라틴어로 'scientia naturalis' -이라는 개념은 도미니크회 성직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게서 유래했다."
"진화론적으로 논증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역사를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역사는 신에서 시작된다. 역사가 과학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저자는 스스로를 과학비평가로 자처한다. 저자의 말을 먼저 보자.
"과학반대자는 많이 있지만 훌륭한 과학 비평가는 없다. 비평가란 자신이 다루는 사안을 전체적으로 사랑하면서 세부적인 실행을 분석하고 때때로 꾸짖는 사람이다."
검증되지 않은 사안인 외계 생명의 존재를 단정하고, 신을 버려서는 안되다고 주장하는 비과학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자신을 과학비평가로 자리매김한다.

저자는 논지가 불투명한 언급도 한다.
"그러면서 ' 나은 ' ' 쉬운 ' 다르다는 점을 망각했다. 참된 과학은 삶을 어렵게 만들고 모든 각자에게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과학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과학에 대해서 때만, 과학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과학이 마땅히 이해되어야 하는 바대로 이해될 , 과학은 다시 슈퍼 스타가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악당이라면, 과학은 악당일 밖에 없다."
"나는 자연과학을 매우 사랑하고 매력적이라고 여기지만,자연 과학을 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도덕적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멩켄이라는 독설가는 "신학은 가치가 없는 것을 가지고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이라고 비꼬았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알 수 없는 것을 사변으로 설명하려는 헛된 시도였다. 과학도 알 수 없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시도한다. 그러나 과학은 검증 가능한 부분까지만 이야기하고 그 이상은 가설로 남겨 놓을 뿐 더 나아가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검증되기 전 까지는 가설로만 존재했다. 힉스 입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철학과 신학은 멈추지를 않는다. 과학은 검증된 지식의 축적이다. 데이비드 슬론 윌슨은 자신의 책에서 과학적 지식을 벽돌로 비유했다. 그 벽돌을 쌓는 도면이 이론이고 그 벽돌로 이론대로 쌓아보았을 때 그 건축물이 타당하면 그 이론은 살아남고 그 건출물이 타당하지 않으면 그 이론은 사라진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과학이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과학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알 수는 있다.

나의 블로거에 피셔의 책을 이미 세 권 소개했다. 과학사를 서술한 그 책들은 훌륭하였으나 과학을 예술처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에서 옆길로 새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 책에서는 완전히 옆길로 샌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독서 추천을 하지 못하겠다.